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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김호중이 까발린 공권력의 민낯
지난 1일 오전 2시께 대전의 한 아파트 야외주차장.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된 차량 7대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운전자는 사고 직후 차를 버려둔 채 사라졌다. 경찰은 차 번호를 통해 운전자가 A 씨임을 확인했지만, 그는 휴대전화도 꺼놓고 잠적했다가 이틀 뒤에야 경찰서에 나타났다. A 씨는 음주 사실을 강하게 부인했고, 음주 측정에서도 혈중알코올 수치는 나오지 않았다. 끈질긴 추궁에 A 씨는 마지못해 “맥주 2잔 마셨다”라고 밝혔으나, 경찰은 혐의 입증에 애를 먹고 있다.
■ 꼼수의 전형
이쯤이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다. 김 씨는 지난 9일 오후 11시 40분께 서울의 한 도로에서 택시를 충돌하는 사고를 낸 뒤 달아났다가 17시간 후 경찰에 출석했다. A 씨처럼 그도 처음엔 음주 사실을 부인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인했고, 이후 다른 의혹들까지 불거지면서 사고 보름 만인 지난 24일 구속됐다.
A 씨와 김 씨, 두 사람에게서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음주운전 뺑소니’ 혐의를 받는 사고를 낸 후 잠적했다가 몸에서 알코올 성분이 다 빠져나간 한참 뒤에 경찰에 자진 출석한 것이다. 사고 당시 음주 정도를 확인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법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는 음주운전 관련 처벌을 피하려는 전형적인 공식이라는 것을.
실제로 음주 측정을 거부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운전자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게 세간의 지적이다. 경찰이 사고 현장에서 음주 측정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면 ‘1년 이상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 원 이상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김 씨처럼 아예 사고 현장을 벗어나면 음주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뺑소니까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음주 혐의는 벗어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SNS 등 온라인에서는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는 정보들이 횡행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법망 피하는 법을 자문해 주는 속칭 ‘음주 구제 일타 변호사’도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
■ 사법 방해?
그런 사실을 고려한다손 치더라도 김 씨의 사례는 훨씬 교묘하고 치밀하다. 김 씨는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도주했고 자택이 아닌 한 호텔에 은신해 있었다. 그는 17시간이 지나 몸에서 알코올이 모두 해독된 뒤에야 나타나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 사이 매니저가 김 씨의 옷을 입고 나타나 거짓 자백을 했다. 소위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김 씨 소속사의 또 다른 직원은 김 씨가 몬 차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없앴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사고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자신이 삼켰다고 진술했다. 김 씨와 소속사의 조직적인 증거 인멸 행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경찰 조사에 임하는 김 씨의 태도도 문제가 됐다. 처음엔 “유흥업소를 방문한 것은 맞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다가, 음주에 대한 여러 정황이 드러나자 “술잔에 입만 댔고 마시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다 결국엔 “술을 마신 것 같다”면서 “양주는 거의 손도 안 대고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찰에 휴대전화를 제출하지 않다가 영장을 통해 압수되자 비밀번호를 온전히 알려주지 않는 등 수사에 비협조적인 모습도 보였다. 그러면서 김 씨는, 심지어는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에서도, 예정된 수 차례의 콘서트를 강행했다. 해당 콘서트들은 못 해도 수십억 원의 티켓 매출이 예상됐다.
김 씨의 행위가 공권력을 기망하는 사법 방해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고가 발생하고 그 뒤 조사 과정에서 보인 김 씨의 태도가 공권력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기고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한 현 세태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처벌은 미미
문제는 우리나라의 공권력이 그런 오만함과 무도함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017년 B 씨는 운전 중 음주단속에 걸리자 경찰을 뿌리치고 편의점에 들어가 소주 한 병을 들이켰다. 음주 측정 거부 후 추가로 술을 마시는, 운전 시점의 음주량 확인을 무력화하기 위한 이른바 ‘술 타기 수법’이다. 결국 B 씨의 음주운전 사실은 입증되지 못했고, 경찰이 궁여지책으로 적용한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 역시 무죄로 결론 났다.
운전자 바꿔치기에도 법원의 처벌은 대체로 미온적이다. 실제로 2023년 광주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도 자신의 모친과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한 C 씨에 대해 법원은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없애는 행위에도 대부분 집행유예 등 낮은 형량이 선고됐다.
김 씨와 관련해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에 경찰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죄가 아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위험운전치상죄를 김 씨에게 적용할 방침이다. 위험운전치상죄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운행할 수 없음에도 차량을 운행해 사람을 다치게 한 데 따른 처벌로, ‘1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김 씨의 경우 사고 당시 혈중알코올농도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위험운전치상죄에 따르면 혈중알코올농도 기준과 상관없이 음주 자체가 위험운전에 영향을 미쳤다면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기가 만만치 않다. 김 씨가 음주의 영향으로 정상 운전이 곤란한 상태였고, 그게 원인이 돼 사고가 발생했음이 증명돼야 하기 때문이다.
■ 무기력한 법
조직적인 증거 인멸 등 죄질이 나쁘고 수사기관을 농락하며 사법 방해를 일으킨 정황이 뚜렷해도 엄중한 처벌이 사실상 어렵다. 비슷한 문제가 다른 나라라고 없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관련 처벌 조항을 사전에 마련해 놓았다. 가까운 일본이 2013년 ‘과실운전치사상 알코올 등 영향 발각 면탈죄’를 도입한 게 그 사례다. 이는 음주운전 사실을 숨기려고 도피·잠적하거나 추가 음주를 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한참 뒤처져 있다. 대검찰청은 지난 20일에야 ‘술 타기 수법’ 등 음주 측정 방해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 달라고 법무부에 건의했다. 아마도 ‘스타 가수’ 김 씨의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런 건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법 당국이 관련 법 체계를 완비하려는 노력을 왜 좀 더 일찍 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컨대, 건강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우리나라 법 체계와 공권력의 민낯이 김 씨 사건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법 체계는 세계 최고다. 그러나 빠져나갈 구멍도 세계 최고다”라는, 결코 웃지 못할 우스개가 세간에 통용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까지 이런 황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여야 하나.
2024-05-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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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곪을 대로 곪은 채용 비리, 선거 공정성에도 타격
“감사원 생활 24년 만에 이런 조직은 처음 본다.” 대체 어떤 조직이길래 대한민국의 모든 행정기관과 공무원 직무를 감찰하는 감사원의 고위 간부가 이런 말까지 했을까. 감사원 고위 간부까지 혀를 끌끌 차게 한 문제의 기관은 바로 선거관리위원회. 헌법 제114조에 그 역할과 조직 구성이 명시돼 있을 만큼 선거관리 전문 기관으로서 헌법적인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곳이다.
그런 선관위가 최근 직원 채용 등 내부 비리가 감사원 감사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순간에 국민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선거관리가 전문인 선관위는 국민들에게 ‘공정과 상식’의 대명사로 통하는 헌법기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은 그동안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 등을 총괄한 선관위의 공정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선거관리는 물론 내부 행정에서도 같은 수준의 공정성 기준이 지켜지고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국민들의 이런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그동안 직원 채용 등에서 상식 이하의 온갖 탈·불법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접한 국민들의 충격은 컸다.
■10년간 매년 상식 이하 특혜 채용
감사원이 이번에 실시한 ‘선관위 채용 등 인력관리 실태’ 감사는 그 대상이 2013년 이후 10년간이다. 그 이전에도 직원 특혜 채용 의혹이 제기됐으나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감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 감사 범위를 넓힐 경우 얼마나 많은 채용 비리가 쏟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최근 10년간으로 기간을 한정했다고 한다.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우선 인력 채용 과정에서 일어난 규정 위반만 무려 1200여 건으로 밝혀졌다. 10년간 중앙선관위에서 124차례, 지방선관위에서 167차례 진행된 경력 채용 중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비리나 규정 위반이 있었다. 3000명에 달하는 전체 선관위 직원 중 10%에 달하는 직원이 채용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감사원이 검찰에 수사 의뢰 등으로 넘긴 선관위 전·현 직원만 무려 49명에 달한다니 그동안 선관위의 내부 규율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 만하다.
채용 비리를 구체적으로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특히 감사원 최고위직의 ‘아빠 찬스’를 통한 공직 사유화가 심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김세환 전 사무총장 아들 A 씨는 인천 강화군청에서 근무하다 2020년 1월 인천시선관위로 이직했다. 당시 인천시선관위는 정원 초과 상태였는데도 중앙선관위는 A 씨가 지원한 이후 경력 채용 인원을 추가 배정했다. 면접 위원 3명은 모두 사무총장과 친분 있는 내부 직원이었고 그중 2명이 A 씨에 만점을 줬다. 김 전 총장의 후임이었던 박찬진 전 사무총장의 딸 B 씨도 광주 남구청에 근무하다 2022년 3월 전남선관위에 경력 채용됐다. 이 과정에서 전남선관위는 외부 면접위원에게 점수 없이 서명만 기재한 평정표를 요구했고 선관위 인사담당자가 사후 면접 점수를 조작해 B 씨를 합격시켰다. 송봉섭 전 사무차장의 딸 C 씨도 충남 보령시청에 근무하다 2018년 1월 충북선관위로 이직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사 청탁이 있었다. 일주일 뒤 C 씨만 대상인 비공개 채용이 진행됐고 C 씨는 만점으로 역시 합격했다.
이외에 지방선관위 상임위원과 국·과장의 자녀 등 부당 채용 사례는 허다했고 무단결근 등 인력 관리도 엉망이었다. 시선관위의 한 사무국장은 8년간 무려 170일을 무단결근하면서 해외여행만 70차례 다녀왔다는 내용도 있다. 선관위의 도덕불감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조직적인 감사 방해 행위도
내부 도덕불감증이 도를 넘어선 선관위는 감사원의 감사 진행 도중에도 국가기관으로선 해서는 안 될 감사 방해 행위까지 조직적으로 벌였다. 감사 시작 전 전직 사무총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 채용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는 것은 물론 부하 직원 간 관련 메신저 내용까지 없애도록 했다. 자료 요구에 시간을 질질 끌거나 관련 서류를 고의로 훼손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선관위의 이런 고압적인 행위는 이전부터 있었다. 감사원과 선관위 간 ‘직무 감찰’을 둘러싼 공방이 30년 동안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계속된 탓이 크다. 1994년 감사원법 개정 당시 국회에서 직무 감찰 대상에 선관위 포함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고 2011년 18대 국회에선 선관위를 제외하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감사원과 선관위의 논쟁은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감사원은 감사원법 제24조에 직무 감찰 대상 제외 기관으로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소속 공무원만 명시하고 있어 선관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선관위는 헌법에 명시된 독립기관인 만큼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버텨왔다. 결국 선관위는 계속 직무 감찰 자체를 거부해 왔고 그러는 사이 선관위의 내부 비리는 곪을 대로 곪아갔다.
■“선관위 해체 수준 개혁” 규탄 봇물
국가 기관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선관위의 행태가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한 심정을 토로한다. 이렇게 부패하고 낯 두꺼운 기관이 최고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선거관리 업무라고 제대로 했겠느냐는 의심과 탄식도 나온다. 2022년 대선 때 코로나 확진·격리 유권자들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소쿠리, 라면상자, 비닐쇼핑백에 담아 옮겨 놓은 일명 ‘소쿠리 투표’ 사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총선 등 사전선거 부정 의혹도 따지고 보면 선관위 불찰로 인해 불거진 측면이 적지 않다.
이처럼 유례없는 내부 비리로 선거 업무의 공정성까지 의심받는 상황에서 선관위는 이제 안팎의 쏟아지는 개혁 요구를 뿌리치기 힘들게 됐다. 이미 전국 6000여 명의 대학 교수들이 참여하는 교수 모임,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 자유변호사협회 등은 해체적 수준의 선관위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국민들도 이번에는 선관위가 강력한 쇄신과 개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여긴다. 국민에게 신뢰와 권위를 잃은 선관위가 과연 공정한 선거관리를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팎의 들끓는 여론을 고려할 때 선관위 개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당장은 대법관을 비롯해 법관이 각급 선관위원장을 맡는 관행부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 선관위가 행정기관인 이상 정기적인 감사를 통해 외부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국민도 많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결과가 지금의 참담한 선관위 추락이다.
현재 선관위는 감사원의 직무 감찰 권한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해 놓은 상태다.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명확히 어떻게 되는지 헌재의 판단을 받아보자는 것이다. 이르면 올해 안에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 여론은 선관위에 부정적이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지금 선관위는 해체 수준의 개혁을 하지 않는 이상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선관위의 존재는 국민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곽명섭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4-05-1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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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국 사회 중독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도박 빚을 갚기 위해 27일 만에 쓴 자전적 소설이 〈노름꾼〉이다. 도박중독자인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을 황폐화하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소설 〈노름꾼〉에서는 도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로 “눈앞에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라고 설명한다. 도박이 마약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이유가 눈앞의 가능성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중독될까? 인간은 쾌감을 느끼면, 뇌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쾌감을 맛본 인간의 뇌는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된다. 그렇게 중독이 시작된다. 인간이 느끼는 쾌락의 정도는 초콜릿(55%), 게임(75%), SNS(85%), 성관계(100%), 니코틴(150%), 코카인(225%), 필로폰(1000%) 순이며 단계가 높을수록 중독의 강도가 세진다. 도박과 마약 등의 중독을 피하는 방법은 애초부터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범람으로 이런 중독에 접근이 너무나 쉬운 현실이다. 노력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중독이 한국 사회를 물들이고 있다. 인간을 황폐화하는 중독의 폐해가 청소년까지 확대되는 점은 심각하다.
1. 집단 도박으로 부산교육청 진상 조사까지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온라인 도박 중독 청소년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과거에는 도박을 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도박장을 찾아야 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도박이 가능해졌다. 국내에 도박 중독에 빠진 숫자만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지난해 9월 25일부터 올해 3월 31일까지 6개월간 ‘청소년 대상 사이버 도박 특별 단속’을 벌여 청소년 1035명을 검거했다. 연령별로는 고등학생이 798명으로 가장 많았고 중학생 228명, 초등학생도 2명 포함됐다. 최저 연령은 9세였다. 청소년들이 도박을 처음 경험하는 평균 나이는 11.3세로 집계되고 있다. 부산경찰청은 청소년 대상 사이버 도박 서버를 운영한 중학생 등 114명을 붙잡아 이 중 도박 서버 운영자 20대 A 씨를 도박 공간 개설 혐의로 구속 송치하고, 도박 서버 운영 총책 중학생 B 군 등 11명을 불구속 송치했다. 중학생인 B군은 ‘바카라’와 ‘룰렛’ 등 21개의 도박게임을 개설한 뒤,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게임머니 충전 및 환전 명목으로 돈을 받아 도박 게임을 진행하고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초등학생과 여중생 2명을 포함한 중·고등학생 등 총 98명의 청소년이 돈을 걸고 바카라와 룰렛 등의 도박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중 한 중학생은 도박 중독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집단으로 온라인 불법 도박인 스포츠 토토를 하면서 부산시교육청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도박 중독으로 상담받는 청소년도 매해 늘고 있다.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부산·울산센터에서 지난해 진행한 청소년 도박 중독 상담은 450여 건으로 1년 전보다 4배 가까이 급증했다. 도박 중독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부산지역 청소년도 2019년까지 연간 한 자릿수에 머물다 2022년에는 16명까지 늘어났다.
도박은 결국 돈과 관련되어 있다. 친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들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도박에 참여하게 된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행위가 중독이 되고, 도박 자금 마련을 위해 고리대금, 금품 갈취, 특수 협박 등 범죄로 이어진다. 학업, 가족 및 교우 관계 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게임적 요소의 강렬한 재미와 쾌감, 돈벌이 등이 도박에 중독되는 원인이다.
부산울산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 김정은 센터장은 “친구가 하니깐 따라서 한다는 호기심에서 온라인 불법 도박에 입문하다가 점점 몰입돼 중간 관리자의 역할까지 맡는 등 과거 n번방처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면서 “태생적으로 온라인 미디어 세대인 청소년 문화도 이를 가속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에서 도박 정보 습득과 공유, 향유까지 부모나 교사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방송통신위원회 등에서 심의와 통제를 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은 가볍게 규제를 넘어서면서 자기들만의 문화로 만들고 있다. 단속에 걸리더라도 ‘나만 억울하게 걸렸다’라고 생각하는 문화도 한몫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불법 도박을 끊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김 센터장은 “도박 중독에 빠진 학생 본인과 학부모, 전문가들의 인식에 큰 차이가 난다”면서 “학부모도 ‘우리 아이는 괜찮겠지’라는 안이함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행동과 통장 계좌 등을 유심히 살펴야 하며 불법 도박에 가담하거나 중독 증상이 보이면 법적인 처벌까지 가는 부분을 인식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 청소년 100명 중 2~3명 “마약 해봤다”
현대의 삶이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얻는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에서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은 생략돼 버린다. 도박이 돈을 버는 과정보다 얼마 벌었느냐가 중요시되는 세태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와 외로움, 고독감에서 스스로 극복하기보다는 손쉽게 외적 약물에 의존해 인스턴트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마약 중독으로 이어진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성인과 청소년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마약류를 사용하는 이유로는 즐거움·쾌락 추구 등의 목적보단 우울과 스트레스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또한, 청소년 응답자 100명 중에서 2~3명은 “마약을 해봤다”고 답했다. 중독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약물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데 그 효능이 있다. 약물에 의해 강하게 유발되는 기쁨은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느낌이다. 한 번 맛 들이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마약은 재범률이 50%에 육박하고, 국내에서도 잠정적으로 100만 명가량으로 추산될 정도이다.
부산마약퇴치운동본부 김상진 상임이사는 “마약은 시작 한 번이 곧 중독의 길로 접어드는 길”이라고 경고한다. 어떤 환경에서 시작됐든 한 번의 즐거움으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김 상임이사는 “최근 마약 범죄에서 주요한 경향은 연령의 하향화”라면서 “조금이라도 일찍 예방 교육을 받아서 마약의 위험성을 인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이제 ‘청소년 마약’까지 걱정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실제로 30대 이하 마약류 사범이 전체의 59.7%를 차지한다. 2012년 30대 이하 마약사범 비율은 35.5%였으며, 5년 후인 2017년은 42%로 6.3%포인트 증가한 반면, 최근 5년간은 18%포인트 증가하였다. 2022년 19세 이하 마약류사범은 전체 마약사범의 2.6%, 481명으로, 2012년 38명 대비 12배, 2017년 119명 대비 4배 이상 증가했다. 20대 마약류 사범은 2000년 1658명에서 2023년 8368명으로 5배 이상 늘었다. 10~20대 마약류 사범의 증가 폭이 가장 컸다. 성장기 청소년 마약류 범죄는 정신적·육체적·사회적 손실을 불러온다.
마약도 도박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중독학과 학과장인 홍성민 신부는 “중독은 쾌감의 보상이 빨리 나는 특징이 있다”면서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현대인들은 기다리기보다는 편리하게 즉각적으로 쾌락을 얻는 것에 매료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 신부는 “중독에 빠지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삶 전체의 변화 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하다”면서 “근원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다른 데서 쾌감이나 혹은 만족감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독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래 걸리는 것은 중독되지 않습니다!” 중독 문제를 연구해 온 홍 신부의 작심 발언이다.
2024-05-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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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세월호 10주기가 던지는 질문
팽목항. 목이 메는 이름이다. 불러도 불러도 응답 없는 이들의 아우성이 환청으로 나부끼는 현장이다.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삶은 그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유족들만 그런 게 아니다. 무참함을 지켜본 국민들 대다수가 그렇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나. 10년 세월이 남긴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되돌아본다.
1. 진상 규명은 이뤄졌나
그날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이다. 원인 규명 작업은 출발부터 흔들렸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참사 205일 만에 출범했는데, 수사·기소권이 없었고 인력·예산은 부족했으며 관련 기관 협조는 제한적이었다.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2017년,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가 출범했다. 목표는 침몰 원인을 밝히는 것. 그런데 선체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내인설’과 외부 충격에 의한 ‘외력설’을 동시에 제시한 채 역시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18년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기록을 넘겨받아 3년 반 동안 추가 조사를 벌였다. 또다시 내부 이견이 팽팽히 충돌했다.
일단 침몰의 직접적 원인은 분명하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어 제대로 고박되지 않은 화물이 쏠리면서 선체가 복원성을 잃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기술적 한계 때문에 확증되지 못했다. 사참위가 제기한 해군·해경의 세월호 CCTV 데이터 조작 및 DVR 바꿔치기 의혹도 2021년 특검 수사 결과 ‘증거·혐의 없음’으로 결론 났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니 참사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 청해진해운 관계자는 실형에 처해졌으나, 해경의 경우 6급 공무원 2명만 유죄가 선고됐을 뿐 지휘부는 무죄 판결을 받고 면책됐다.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특조위, 선조위, 사참위, 특검과 검찰 특별수사단 등 공적인 조사 기구가 여러 차례 구성됐음에도 속 시원한 진상 규명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한편 이런 목소리도 있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나 참사 순간의 세부적 사실관계 파악에 너무 매달렸다는 것. 그 때문에 결함 있는 배의 출항이라든지 해경의 구조작업 실패 같은 참사 전후의 총체적 진실을 밝히는 일이 더 힘겨워졌다는 관점이다.
유족들은 납득할 만한 근거만 있다면 어떤 결정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역 없는 조사가 더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기록물을 비롯해 해경 레이더 영상, 국가정보원 사찰 정보 같은 미공개 자료가 완전히 공개돼야 한다고 유족들은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2. 사회는 얼마나 안전해졌나
“대형 사회재난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최근 동아대 긴급대응기술정책연구센터의 재난안전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이렇게 대답했다. 국민들은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가 재난 관리와 안전 대비에서 별반 나아진 게 없다고 보는 것이다. 되레 응답 비율은 4년 전 조사 때보다 11.5%P나 높아졌다. 왜 그런 걸까.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 비극이 끊이지 않아서다. 불과 이태 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태원 참사의 기억은 생생하다. 위기 앞에서 또다시 정부의 무기력이 드러났고, 159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인파 밀집 사고의 예방과 사후 대응에서 모두 실패한 인재로 기록된다.
돌이켜보면, 안전 불감증이 낳은 대형 참사는 최근까지 한시도 끊긴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29명 사망), 2018년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47명 사망), 2020년 경기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38명 사망), 2023년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침수(14명 사망) 등등. 그때마다 당국의 통제와 대처는 부실했고, 관련 매뉴얼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예방이나 교육은 있으나 마나였다. 부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초량 지하차도, 학장천 산책로 등지에서 안타까운 인명사고가 잇달았다.
이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탄생한 재난 컨트롤타워가 제 역할을 못 했다는 방증이다. 2014년 해경·소방 기능을 흡수해 재난안전 분야를 총괄하는 국민안전처가 신설됐다. 하지만 2년 8개월 만에 간판을 내렸고, 이후 이를 이어받은 재난안전관리본부가 행정안전부에 설치됐다. 본부장은 행안부 차관급인데 현재로선 안전 관련 최고 직급이다. 국무회의 참석이 불가능한 구조에서 재난안전 대책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지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정확한 사고 원인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도맡는 별도의 독립기구 설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재난 대응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에 방점을 찍는다. 사고 수습이나 복구도 중요하지만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재난 예방과 대비에 70%를, 대응 복구에 30%를 투자한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는 정반대 비율에 머물러 있다.
3. 마음의 상처는 아물었나
10년이라는 세월이 길어 보여도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세월호 유족들은 대부분 조현병과 우울증, 자살 충동의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진상 규명에 매진하다 보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부 지원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니 냉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세월호 피해 지원 특별법’에 따라 유족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해 왔다. 지급 기간은 시행령에 따라 ‘2024년 4월 15일까지’로 정해져 있다. 정부가 시행령을 새로 고치지 않으면 의료비 지원은 올해로 끊기는데, 형평성 문제와 재정 건전성 때문에 지원 연장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시한을 고치는 법안이 21대 국회에서 발의되기도 했으나 논의가 미뤄져 자동폐기 직전이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비 지원을 2090년까지 지정해 사실상 평생을 보장한다. 국가 재난으로 발생한 트라우마 치료에 기간을 두는 것 자체가 사회적 책무의 방기에 가깝다. 참사 피해자에 대한 장기적 지원은 선택 아닌 필수여야 한다는 뜻이다.
재난으로 인한 마음의 속병은 신체적 장애보다 후유증이 길다. 정상적인 애도와 트라우마 치료 과정을 거치지 못한 참사 피해자들은 더 그렇다. 트라우마는 3년, 5년, 10년을 주기로 가중되고 그때마다 숨어 있던 것이 터져 나온다고 한다. 전문적인 심리 치료를 통해 이들의 고통을 보듬는 정책 지원이 그래서 중요하다. 여기에는 유족은 물론 참사를 목격하거나 구조에 투입된 사람을 비롯해 인근 거주민 등도 포함될 수 있다.
앞서 제기된 세 가지 질문은 국가적, 범국민적 자성과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시선은 늘 해결해야 할 숙제, 미흡한 실천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월호 10년’은 고통의 시간이었으나 많은 걸 바꿔 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후의 사회적 재난을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이 됐고, 재난에 더 신경 쓰고 안전 문제에 더 민감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이들이 바로 유족들과 참사 피해자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덕분에 우리는 어렵게나마 한발 한발 나아간다. 더 이상의 참극이 일어나지 않는 소망의 사회를 향해.
2024-04-1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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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공간이 갖는 역사성 '옛 부산세관 청사 복원'
1979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 부산세관 청사. 최근 지역 사회에서 이 건물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부산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역사성 있는 건물을 복원해 부산 현대사의 DNA로 삼자는 논의다. 부산세관 내부는 물론이고, 복원을 요청하는 지역 사회, 시민 단체의 목소리도 높다. 무엇이든 없어지고 나면 그 가치와 중요성을 안다 했던가? 옛 부산세관 청사 건물이 그랬다. 십여 년 전부터 건물 복원은 지역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건물을 복원할 땅도 예산도 있고, 어느 때보다 복원에 대한 내부와 지역 사회의 열망도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혹자는 “왜 이미 사라진 건물을 굳이 복원하려 하느냐”고 심드렁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옛 부산세관 청사 복원은 그리 단순하게 볼 일이 아니다. 복원이 왜 필요한지, 그 당위성을 따져보자.
가치 있는 자산인가
부산세관은 본래 부산해관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907년 해관에서 세관으로 그 명칭이 바뀐다. 부산해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것은 1883년. 부산항 개항(1876년) 후 7년 만의 일이다. 관세행정기구지만 근대문물이 유입되는 관문이었다. 세관 설치는 곧 부산 근대화의 출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세관 옛 청사는 1908년에 기초공사를 시작해 1911년 8월에 준공됐다. 좌우가 비대칭적인 L자형 지상 2층 벽돌구조에 건물이 꺾이는 지점에 추가로 2층 높이의 탑신부가 더해진 형태를 취한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지어, 르네상스 양식의 고풍스러운 외관을 자랑했다. 이 건물은 개항 이후 역사적·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다 보니 당시 부산항의 대표적 건물이 됐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 군수사령부에 징발돼 4년 남짓 미군사무실, 탄약창고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성, 건축성을 인정받아 1973년 6월에는 부산시 지방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광복 이후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곳도 부산세관이었다. 이렇게 부산항 관문을 지켜온 이 건물은 1979년 부산대교가 건설되면서 도로 확장으로 철거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의 불찰이었다.
부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장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미래 가치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옛 부산세관 청사 복원이 꼭 필요하다. 부산항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상징물로 옛 부산세관만 한 건축물도 없다.
복원은 가능한가
옛 부산세관은 부산 근대사의 핵심이다. 근대 부산의 출발이며, 부산항 성장 발전의 기점이다. 따라서 부산세관 복원 없이 부산 근대사 복원이란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옛 청사 복원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3년, 2018년에도 복원 필요성이 공론화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부지 문제 등으로 현실화하지 못했다. 지금은 본래 자리는 아니지만 복원할 수 있는 땅이 생겼다. 부산세관은 관세청 소유의 국립부산검역소·부산출입국외국인청(2038㎡) 부지를 부산항만공사(BPA)에 넘기고 현재 리모델링 중인 부산세관 건물 뒤편의 BPA 소유 북항 재개발 1단계 부지(1만 3503㎡) 중 일부를 받아 그곳에 옛 부산세관을 건립한다는 복안이다. 새롭게 확보한 부지는 옛 세관 청사가 있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0m가량 떨어진 곳이다.
부산세관 옛 청사 건물 맨 위에 있던 종탑은 현재 세관 청사 뜰에 남아 있다. 당시 기초 설계 도면과 옥탑부 하부 기초 단면도, 철거 때 사진 등도 있다. 부산세관은 건물 복원에 100억 원가량이 들 것으로 추산하고, 정확한 소요 예산 규모를 산정 중이다.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복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때마침 북항 재개발 공사가 진행 중이고, 부산항 개항 150주년도 앞두고 있어 시기상으로도 적절하다. 내년에 복원 공사를 시작해 부산항 개항 150주년이 되는 2026년께 완공한다는 계획이다.
복원을 위해서는 시민 공감대와 전문가 등의 참여가 기본인데, 부산원도심활성화연구회 등 든든한 우군도 이미 확보돼 있다. 지난 2월엔 복원 관련 토론회도 열렸다.
공간 활용은 어떻게
부산세관은 복원한 옛 청사를 시민 편의 시설로 운영할 계획이다.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은 “복원 청사의 경우 세관박물관이나 부산항역사관, 또는 시민을 위한 복합공간 등으로 활용하는 것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오래된 항만에는 관련 유물과 함께 항만의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역사적인 건축물을 활용해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재질과 형태가 옛 부산세관 청사와 매우 흡사한 일본의 요코하마 개항기념회관은 1917년 지어진 건물로 지금도 역사유물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8년 군산항에 건립된 군산세관 옛 청사도 호남관세박물관으로 활용돼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1927년 완공된 중국 상하이 세관 청사는 현재도 세관 청사로 사용 중이다. 야경이 수려한 이 건물은 개항기 유럽식 역사 건축물이 즐비한 상하이 와이탄 거리에서도 손꼽히는 관광객 필수 방문 코스 중 하나다.
부산은 개항과 한국전쟁, 산업화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대한민국 생활 유산의 보고다. 부산세관의 역사는 개항 후 한국 근대화와 부산의 역사다. 부산세관 옛 청사 복원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란 얘기다. 부산항의 역사를 뚜렷이 드러냄과 동시에 부산항의 미래를 펼쳐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복원 건물, 어떤 역할 할 것인가
최근 개관한 부산근현대역사관을 찾는 시민의 발길이 하루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시민의 발길이 잦다는 것은 그만큼 근대 역사에 대한 부산 시민의 갈증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원된 부산세관이 부산항에 얽힌 다양한 기억으로 채워진 박물관이나 역사관으로 거듭난다면, 이는 역사에 대한 시민의 갈증 해소와 함께 지워진 근대를 복원하는 일이다.
더불어 복원된 청사 건물은 중구 원도심과 첨단 북항을 잇는 근현대유산벨트 또는 역사문화관광벨트의 연결점이자, 부둣길이 시작되는 기점이 될 것이다.
우리 일상은 도시와 건축, 공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도시의 일상과 일상 속 건축엔 많은 사람의 흔적과 이야기가 녹아있다. 오랜 세월 속 이야기가 쌓인 도시는 그 자체가 경쟁력이다. 이야기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도시와 건축,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임시수도기념관-동아대 석당박물관-부산근현대역사관-옛 부산세관 청사-부산항 1부두 창고로 연결되는 이 공간은 부산이란 도시의 과거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어떤 공간으로 물려줄 것인가
옛 부산세관 청사 복원은 역사를 핑계로 복원이 아니라 재현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성급하게 지금부터 완공 시기를 못 박기보다는 문화재 전문위원의 의견 수렴 등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제대로 된 복원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복원을 위해선 기초 도면뿐만 아니라 시공 도면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현이 아닌, 복원이라는 점에서 일리 있는 주장이다. 기념건조물과 유적지의 보존과 복원을 위한 국제 헌장인 ‘베니스 헌장’에는 ‘추정(conjecture)이 시작되는 순간 복원은 멈춰야 한다’고 돼 있다.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자칫 복원의 결과가 단순 흉내나 재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 복원하려는지,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좀 더 심도 깊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장소를 복원하는 것은 자칫 박제된 과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부산세관 옛 청사 복원은 우리의 과거 기억을 전달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복원되었을 때 이 공간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기억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공간의 기억을 스스로 환기해 그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현재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도시는 어떤 도시인가?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가? 어떤 도시를 물려주고 싶은가? 복원을 앞둔 지금, 다시 질문을 던진다.
2024-04-0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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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치솟는 물가, 위태로운 국민 삶
사과 1알 1만 원! 좀체 믿기지 않던 이 가격이 이젠 ‘가능한’ 현실이 됐다. 도매가격으로도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후지 사과 10kg 도매가격이 9만 원을 훌쩍 넘은 것이다. 정부는 지난달 초만 해도 설 명절에 따른 수요 급증 탓이라며 설이 지나면 가격이 안정세를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전망은 틀렸다.
■사과만이 아니다
다른 과일 가격도 무섭게 치솟고 있다. 지난달 복숭아 가격 상승률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배는 외환위기 이후 최고 상승률을 보였다. 귤, 딸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과일 전체로 따지면, 지난달 상승률이 40.6%로 1991년 9월(43.7%)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채소 가격도 연달아 올랐다. 부추와 배추, 상추, 파 등의 가격이 전년 대비 못 해도 2배 이상 올랐다. 수산물 가격도 심상치 않다. 마른 김이 1년 만에 40% 가까이 뛰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오징어, 냉동 고등어, 북어 등 서민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수산물의 가격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형편이니 전체 물가가 요동칠 수밖에 없다. 올해 1월 2%대로 떨어졌던 소비자물가가 지난달 3% 넘게 올랐다. 앞으로가 더 불안하다. 정부는 연간 목표치 2.6%를 제시했지만 지금 추세라면 불가능한 수치다. 국민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77%는 향후 물가가 현재보다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물가 잡기 총력전?
“세븐일레븐, 대규모 물가 안정 ‘갓성비’ 행사 진행!” “농협, 대국민 물가 안정 단독 기획전 개최.” “CJ제일제당, 밀가루 제품 가격 인하!” 국내 유통·식품업체들이 잇따라 물가 부담 낮추기에 나섰다는 보도가 신문 지면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여기엔 배경이 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비상경제장관회의를 통해 ‘현장 중심의 범부처 특별물가안정체계’를 출범시켰다. 모든 부처 차관이 물가안정책임관이 돼 품목별 물가 대응방안을 마련한다는 게 요지다. 이후 전에 못 보던 장면들이 나타났다. 기획재정부 차관이 대형마트를 찾고,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석유시장 점검 회의를 열고,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은 외식 관련 업체 관계자들을 만나는 게 그렇다.
실제로 한훈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은 지난 12일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농협 하나로마트, GS리테일 등 유통업체 임원들을 만난 데 이어, 13일에는 CJ제일제당, 오뚜기, 롯데웰푸드, 농심 등 19개 식품기업 대표들을 만나 물가 안정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 차관은 해당 업체들에 “가격 담합 시 조사에 착수하겠다”며 엄포도 놓았다. 지난 14일에는 김병환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농수산물 도매시장을 방문해 “유통비용 절감을 통해 물가 안정에 동참해 달라”고 촉구했다.
정부는 대대적인 돈 풀기에도 나섰다. 11조 원 규모의 예산을 올해 상반기 중 투입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과일 등 농축산물 관련 대책이 가장 구체적인데, 정부가 지난 15일까지 밝힌 지원 규모는 유통업체 납품 단가 지원에서 직접적인 할인 판매 지원까지 무려 1600억 원이 넘는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인데, 향후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즉흥적인 땜질식 처방
이처럼 정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물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예산만 축낸다는 목소리가 크다. 정부의 물가 대책이 즉흥적이고 다분히 땜질식이라는 인상이 짙다는 비판이다. 물가 폭등의 원인을 정부 스스로가 아닌 기업 등 외부에서만 찾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지금 물가 폭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과 가격 관련 대응이 좋은 예다. 정부는 유통단계 관리에만 치중할 뿐 근본 원인인 생산과 공급 측면에선 확실한 대처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대적인 지원 정책을 발표하지만 이는 물가를 잡는 게 아니라 가격 인상분을 국민 세금으로 대신 지불하는 것일 따름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돈을 쏟아부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이상기후와 재배면적 축소에 따른 공급량 급감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할 것을 주문한다.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급을 늘려야 하고, 이를 위해선 안정적인 생산 기반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안정적 생산 기반 마련은 다른 게 아니다. 새로운 재배 농가에 대한 지원책 등 장기 대책을 마련하고, 저비용 고효율 생산을 위한 재배법과 품종 개발에 대한 연구에도 박차를 가하는 한편, 관세 등 수입 문턱을 낮추는 등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
우리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낮고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높다. 이상기후나 전쟁 등 외부 충격에 따른 물가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대응 시스템은 현저히 미흡하다. 독과점식 시장 구조가 강한 탓에 물가가 오를 땐 쉽게 오르지만 일단 오르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우리나라의 특징이다. 정부가 효율적인 물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이런 물가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다.
정부가 다른 품목보다 좀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공요금 관리도 물가 대책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다. 정부가 지금은 과일 등 생활물가에 치중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근래 물가 폭등의 주범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무분별한 공공요금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내외적 요인으로 물가가 인상 압박을 받으면 통상적으로 공공요금 안정을 통해 물가 압박을 낮춰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근래 전방위적으로 공공요금 인상을 주도했다. 그 결과 버스비 등 교통 요금은 물론이고 전기료, 난방비, 수도요금까지 급등했다. 인상이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그 시기와 속도, 강도가 문제였다. 실제 지난 1년간 공공요금 상승률은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크게 웃돌았다. 고물가 국면에서 단기간에 공공요금 전반을 인상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전적으로 정부 책임
근래 물가 폭등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에 석유·가스 등 에너지 가격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를 잡아야 하는 정부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삼모사식 대책으론 작금의 물가 폭등을 진정시킬 수 없다. 근본 성찰을 통한 중장기 대책이 있어야 가능하다.
정부는 물가 폭등의 원인을 기업 등 외부에서 찾으며 감시와 단속, 대대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그렇게 하는 건 일시적인 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일각에선 정부의 이런 행보가 오는 총선을 겨냥한 ‘단기적인 보여주기 행정’이라는 의심의 시선을 보낸다. 그동안 정부에 의해 억눌렸던 물가 상승 요인들이 총선 후 한꺼번에 폭발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8일 “정부는 장바구니 물가를 내릴 수 있도록 농산물을 중심으로 특단의 조치를 즉각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 시점에서 특단의 조치는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특단’보다 ‘근본’ 대책과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대선후보 당시 ‘물가 상승은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로 언급한 바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방법이 없다”거나 “할 만큼 하고 있다”는 건 정부가 할 소리가 아니다. 국민은 지금 당장 죽을 판이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그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4-03-2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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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SMR, 탄소제로 게임 체인저 될 수 있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경남도청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소형모듈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 SMR) 연구개발(R&D)과 산업화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 의지를 밝히면서 SMR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경남 창원을 글로벌 SMR 클러스터로 육성하겠다고 했다. 안 장관은 “해외 팹리스 기업 설계를 국내 파운드리에서 생산하는 반도체처럼 전 세계 다양한 SMR 모델을 창원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다”며 “경남 창원이 반도체의 삼성전자와 같은 SMR 클러스터로 거듭나도록 지역 기업 육성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SMR은 대형 원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건설이 쉽다는 점 때문에 기후변화에 대응한 미래 에너지로 주목받으면서 세계 원전 선진국을 중심으로 시장 선점을 위한 기술개발 전쟁이 한창이다. 물론 경제성과 안전성 논란이 여전하고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 안전성·효율성 대형 원전 대안 부상
SMR은 공장 제작형 모듈 기술을 활용한 300㎿e 이하 소형 원자로를 말한다. 원자로, 증기발생기, 냉각재펌프 등 주요 기기를 하나의 용기에 일체화시켜 안전성을 높이고 효율적 운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강점이다. 원전은 냉각 기능을 상실하면 노심용융 현상이 일어나고 수소 폭발로 이어진다. 대표적 경우가 후쿠시마원전 사고다. 대형 원전은 대형화에 따른 배관 등 각종 설비로 재해 시 방사선 누출에 취약한 구조다. 그런데 SMR은 일체형으로 방사선 누출 가능성을 차단하고 사고 발생 시에도 원자로를 통째로 물과 같은 냉각재에 담아 식히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안전도를 획기적으로 높인다.
대형 원전은 원자로 열을 식혀야 하므로 바닷가에 건설해야 하는 공간적 제약이 있지만 SMR은 설계와 시공이 단순하고 상대적으로 부지 접근성도 높다. 탄력적 출력 조절로 효율성도 확보된다. 이 때문에 발전용뿐만 아니라 열을 활용한 지역난방, 재생에너지 간헐성 보완, 해수 담수화, 우주개발, 그린수소 생산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 가능한 미래 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 전 세계 상용화 위한 기술개발 전쟁
영국 국립원자력연구원은 2035년까지 전 세계 SMR 시장 규모가 665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 때문에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원전 선진국을 중심으로 SMR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다. 전 세계에서 80종의 SMR 개발이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EU)도 지난달 민관 연합을 출범시키고 2030년 초 SMR 실용화 목표를 발표했다.
미국은 바이든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뉴스케일파워, 홀텍, X-에너지 등의 기업이 기술개발과 상용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도 10억 달러를 투자해 나트륨을 냉각재로 활용한 차세대 SMR 개발을 통해 2030년 발전소를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부유식 해상 SMR을 운영 중인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육상 SMR 상용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 국내 혁신형 SMR 개발·산업생태계 조성
정부는 SMR 선도국 도약을 위한 전략으로 △독자 기술개발 △선제적 사업화 △국내 파운드리 역량 강화를 제시했다. 국책사업인 혁신형 SMR(i-SMR) 기술개발을 2028년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으로 올해 예산도 전년 대비 9배 증액했다. 산자부는 산업생태계 조성을 위해 SMR 제작지원센터 구축 공모에도 들어갔다. 보조기기, 로봇 활용, 3D 프린팅 등 3개 제작지원센터에 각각 100억 원가량 국비를 지원한다는 계획인데 경남과 경북은 물론 부산도 도전장을 내는 등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뜨겁다.
부산시는 보조기기 분야에 신청하는데 주기기는 창원 중심으로 이뤄진다 해도 보조기기의 경우 원전과 관련 기업이 밀집해 있고 향후 원전 환경복원 산업과의 시너지도 감안하면 부산이 적지라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부산상공회의소, 한국기계연구원과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SMR이 미래 성장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두산에너빌리티는 물론이고 현대건설, DL이앤씨, 삼성물산 등 국내 건설업계도 사업에 뛰어들었다.
■ 안전성·경제성 없다는 반론도 여전
탈핵경남시민행동, 경남환경운동연합, 경남기후위기비상행동 등 환경단체들은 지난달 26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SMR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너무 비싸고, 너무 오래 걸리고, 너무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경남 창원 SMR 클러스터 구축은 아니면 말고 식 퍼주기 표심 잡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대형 원전이 더 이상 세계 전력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자 비상이 걸린 원자력 업계가 돌파구로 들고나왔지만 경제성과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뉴스케일파워가 아이다호주에 건설을 추진 중이던 SMR도 결국 경제성 문제로 지난해 좌초됐다는 사실이 그 근거로 등장한다. 환경단체들은 불확실한 미래인 SMR에 막대한 투자를 할 게 아니라 현재 7%에 불과한 국내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높이는 노력이 더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 분산에너지 실현 수용성이 성패 가른다
세계는 에너지 전쟁 중이다. 1월에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 도래하면 에너지, 특히 전기 수요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증하는데 이에 어떻게 대비할지가 화두였다. 당장 국내에서만 해도 반도체 파운드리와 데이터센터 건설로 에너지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뜨겁지만 현 기술 수준에서의 세계적 공감대는 ‘에너지 믹스’다. 미래 완전한 청정에너지 달성을 목표로 가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탄소제로를 위한 SMR 등 기술적 보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정부가 SMR 연구개발과 산업생태계 조성에 뛰어든 이상 넘어야 할 과제도 많다. 미국은 대형 원전과 SMR 규제를 분리해 원전 비상계획구역도 반경 230m 정도로 대폭 완화했다. 우리도 원자력안전위원회와 산자부가 지난 1일 ‘SMR 규제 연구 추진단’을 설립하고 세부 시행안 마련에 나섰다. 이와 별도로 6월 14일 시행을 앞두고 있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에도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와 함께 SMR이 명시됐다. 부산과 같이 원전 밀집 지역에서 에너지를 대량 생산한 후 수도권에 공급하기 위해 송전선로 등 기회비용이 발생하는 부작용을 없애고 향후 지역별로 에너지 자립을 유도하자는 취지다. 법 취지를 달성하려면 수도권 곳곳에 SMR을 분산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SMR은 기술개발을 통해 안전성과 경제성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지역별 수용성이라는 벽을 또 넘어야 한다. 그 허들을 넘어설 수 있어야 진정한 미래 에너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24-03-0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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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북한 '민족·통일 부정' 대응은
2007년 봄 서울을 떠난 버스는 불과 1시간 만에 북한 개성공단에 닿았다. 의료 봉사 단체 그린닥터스의 협력 병원 개원식 취재 차 부산 기업인 일행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이었다. 남북한을 넘나들 때는 여권 대신 통일부 장관이 발급한 ‘방문증명서’가 사용됐다. 그 과정은 ‘입국’, ‘출국’이 아닌 ‘입경’, ‘출경’이라 불렸는데 이 용어에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가 녹아 있었다. 각각 유엔에 가입해서 국제 무대에서 엄연한 주권 국가였지만 1972년 7·4공동성명으로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자주적 통일을 추구하는 특수한 관계’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뒤 체제 경쟁과 크고 작은 무력 충돌까지 신산의 고비를 겪었지만 그간 남북한 모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내년이면 광복 80주년인데, 이 ‘특수 관계’는 그 모진 풍파를 견뎠다. 한데, 북한이 최근 이 ‘특수 관계’를 거부하고 나섰다. ‘민족·화해·통일’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교전 상태의 제1 적대국’ 운운하면서 이제 두 개 국가로 따로 살자고 나선 것이다.
한집 살림을 약속한 상대편이 박차고 나가 버린 셈인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우리의 선택이다. 미국 대 러시아·중국 갈등과 맞물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적 대결 구조가 형성되려는 와중에 남북 관계 패러다임에 중대 변수가 생긴 것이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2023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통일 필요성에 긍정적인 비율은 43.8%로 2007년 조사 이후 최저치다. 우리 내부에서도 통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이다. 이런 국내외 흐름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가 선 이 지점이 자칫 영구 분단의 갈림길일 수도 있다. 낭만적 통일론을 뛰어 넘어 평화 체제를 안착시킬 수 있는 ‘신 북한 독트린’이 필요한 시점이다.
분단 3세대 김정은의 통일 거부 선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4일 미사일 발사 현장에서 “해상 국경선을 믿음직하게 방어”하라고 지시한 뒤 “국경선을 침범하면 무력 도발로 간주할 것”이라는 ‘말 폭탄’을 날렸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시 발언은 상투적이지만, ‘국경선’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의도적으로 사용한 대목이 주목된다. 지난달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또 “전쟁이 나면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하는 내용을 헌법에 명기하라고 지시했다.
나아가 김 위원장은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을 철거하라”고 지시하고 남북 경협의 통로이자 접점인 경의선을 끊으라고 했다. 선대(김일성, 김정일)의 업적이자 유훈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이다. 또 지난 연말 노동당 회의에서는 “흡수 통일, 체제 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며 대남 정책의 기조 전환을 거칠게 주문했다. ‘남조선’을 ‘대한민국’으로 바꿔 부른 맥락에서 남북경협 관련 법률과 통일 관련 기구·조직은 폐지, 축소되고 대남 방송도 중단됐다. 실제 개성공단으로 가는 경의선 육로에 지뢰를 매설해 길 자체를 끊었다. 남한과 연을 끊겠다는 의지를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까지 보인 셈이다.
남한과 ‘헤어질 결심’을 한 까닭은?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15일 국회 토론회에서 “북한이 체제 경쟁에서 완패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규정했다. 적화 통일은커녕 오히려 흡수 통일을 당할 위기 의식에서 빗장을 닫은 것이라는 인식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부 결속, 대내용 메시지”라고 단언하고 두 가지 측면을 설명했다. ‘교전 상태의 적대국’ 규정은 최근 한미 연합훈련이나 미국 전략자산의 전개에 따른 불안과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고, 민간 교류로 한류 드라마, 노래가 북한에서 퍼지자 체제 단속이 절실한 상황에서 나온 행보라는 것이다.
반면 지난달 15일 무소속 윤미향 의원실 주최 토론회에서는 지금까지는 ‘특수 관계’인 동족을 향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는데, ‘대한민국 것들’을 민족이 아닌 교전 상태의 주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북한 핵 독트린의 논리적 함정을 메웠다는 주장이 나왔다. 북한이 신냉전 정세를 활용해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얻고 남한을 따돌린 채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을 의제로 미국과 직접 담판을 지으려 한다는 확장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서독, ‘통일 불가’ 고집한 동독 끝까지 설득
북한의 ‘민족 부정’은 옛 동독이 ‘2국 체제’를 고집하면서 분단 유지를 고수했던 사례를 연상시킨다. 서독은 동독의 ‘통일 불가’를 수용하지 않고 민족 통일을 법률에 규정한 채 끈질기게 교류를 이어갔다.
한국과 독일 언론의 통일 보도를 비교 연구한 동명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이화행 교수는 “서독에서도 분단 체제를 유지하자는 흐름이 있었으나, 결국 장기간 인내하면서 통일 정책을 고수한 덕분에 결정적 순간이 오자 민족 통일을 달성했고 국력 신장까지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TV 등 서독의 문화와 정보가 동독으로 유입된 영향이 컸다”고 덧붙였다.
현실주의 대 전략적 접근
북한의 ‘통일 불가’ 입장이 전해진 뒤 국내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주의’일 뿐인 통일을 추구하는 대신 ‘외교 관계로 협력을 도모’하자는 현실주의 흐름도 등장했다.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는 취지로, 2개 국가를 인정하고 공존책을 찾자는 것이다. 즉, 평화 공존형 2국 체제론이다.
반면 ‘민족·통일 부정’을 한국이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전략적 접근론도 지지를 얻는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역학 관계로 볼 때 한국이 통일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일중러 4개국은 영구 분단 체제를 내심 반길 공산이 크다. 미국과 일본은 한미일 삼각 동맹의 강화에 주목할 테고,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의 패권 경쟁 전선에 북한의 완충 역할을 기대할 테다. 특히 중국은 북한에 변고가 생길 경우 ‘이해 관계’를 주장하며 개입할 여지를 노려 한국이 ‘특수 관계’가 아닌 쪽으로 정리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앞으로 북한은 미국, 일본과 직접 담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구도가 굳어지면 한국은 한반도 현안에서 패싱당하거나 운신의 폭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통일은 고사하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 주도권을 쥘 수가 없다. 이것이 남한이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 즉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관계라는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다.
‘쿨’하게 헤어지고도 평화 공존을 얻을 수 있으면 그 방향을 선택하면 되지만 현재로서는 난망이다. 북한의 ‘교전 중 적대국’ 프레임이 전쟁 위험성을 그대로 안고 있어서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에 남북 화해와 민족 통일을 전제하는 것이 동력이 된다면 전략적으로 ‘특수 관계’ 노선을 고수해야 된다. 물론 북한이 ‘통일 불가’를 선언한 상태라 난관은 불가피하다. 현실론이건 전략적 접근이건 어떤 경우라도 ‘전쟁 없는 한반도’가 대원칙이다.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한다. 우리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영구 분단과 평화 공존의 복합 변수가 얽혀 있는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다.
2024-02-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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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트럼프 ‘시즌2’ 가능성 고조
“재집권하면 중국에 60% 이상 관세를 물리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폭스방송에 출연해 예의 거친 입을 자랑했다. 이튿날에는 한 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직격했다. “당장 토론하자. 10번은 어떠냐.” 공화당 토론은 생략한 채 곧바로 맞붙겠다는 자신감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올해, 트럼프의 기세가 심상찮다. 트럼프는 지난 1월 첫 번째, 두 번째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사실상 본선행을 확정 지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는 트럼프로 시작해서 트럼프로 끝난다”는 말까지 있는데, 11월 5일 대선 결과가 그 열쇠다.
트럼프의 귀환은 국제 질서의 대대적 지각변동을 의미한다.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내부 혼란과 갈등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예상된다. 어느 쪽이든 지구촌 전체의 향방을 쥐고 있다. 특히 한국 입장에서는 경제·안보 환경의 급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가늠해 보고 그 대응 방안을 서둘러 궁리해야 하는 이유다.
트럼프, 대세론 굳힐까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치러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인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50%가 넘는 압도적 득표율로 승리했다. 당원뿐 아니라 일반 유권자도 참여하는 경선에서의 승리라는 점에서 ‘트럼프 대세론’의 확인이다. 결국 미국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전략과 정책이 통하고 있음을 뜻한다. 역대 사례를 보건대, 처음 두 번의 경선을 잇달아 이긴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모두 최종 대선 후보로 지명된 바 있다. 이변이 없는 한, 민주당 후보가 될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재대결이 유력하다.
공화당 경선의 다음 격전지는 2월 24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다. 트럼프의 대항마인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의 정치적 고향이라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미 대선의 1차 분수령은 3월 5일 ‘슈퍼 화요일’이라 할 수 있다. 16개 지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동시 경선이 치러지는 이날, 대의원 36%가 결정된다. 그런 만큼 7월 전당대회 전에 트럼프가 대선 후보로 조기 확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전날인 3월 4일 트럼프에 대한 첫 재판이 시작된다. 트럼프는 2021년 의사당 폭력 사태에 연루돼 형사 기소된 상태다. 내란 선동, 기밀문서 유출 등 혐의가 91개에 달하는데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최대 변수로 꼽히는 이른바 ‘사법 리스크’다. 하지만 낙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최종 판결도 대선 투표일 전에 나올 확률은 희박하다.
세계가 긴장하는 미국 최우선주의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지구촌의 근본적 변화가 예상된다. 그 요체는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보다는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세상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무엇보다 ‘미국 최우선주의’의 강화다.
군사·안보 측면에서 트럼프의 기본 입장은 더 이상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맡지 않겠다는 것이다. 동맹국의 안보는 전적으로 해당 국가에 맡긴다는 발상이다.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기존의 동맹 관계나 전략적 가치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의 해외 분쟁 개입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크라이나 지원은 축소되거나 중단될 게 분명하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서도 바이든과는 다른 노선이 나올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흐름과 상반되는 통상 정책이 유력하다. 모든 수입 품목에 대한 10%의 기본관세 부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폐기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중국에 대한 공세가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는 불공정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거두는 나라로 중국을 지목해 왔다.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은 기후변화와 인권 문제 등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바이든 행정부의 관련 의제들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도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트럼프 재집권 땐 한국도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지난해 말 미국 헤리티지 재단이 공화당의 정권 교체 보고서를 공개했는데, 동맹국들에게 방위비 분담을 크게 늘리도록 강력히 독려해야 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터무니없는 억지를 통해 상대를 마구 흔드는 것이 트럼프의 스타일이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에 대한 방위비 대폭 증액 요구가 또다시 몰아칠 것으로 관측된다.
보호무역주의로 한국 경제가 받는 타격은 그 정도를 추산하기조차 힘들다. 10% 기본관세 부과는 특히 치명적이다. 국제교역이 위축되면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대단히 불리하다. 세계 경제의 블록화가 가속화할 경우 한국의 경제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자동차 같은 주력 산업이 다양한 대외 위기에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IRA의 핵심 분야인 친환경과 신재생에너지에 지속적인 반감을 드러낸 인물이다. 이어지는 수순은 IRA의 폐기 혹은 전면 수정이다. 이게 전기차 보조금 축소로 이어지면 미국 시장에서 대규모 투자·판매 실적을 거두고 있는 한국 자동차·배터리 기업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통상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특정 지역에 의존하지 않는 수출 시장·공급망 다변화가 관건이다. 관세 충격을 버틸 기술 경쟁력의 확보에서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이는 트럼프 재집권과 상관없이 우리 경제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한반도 위기관리, 중대한 변곡점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정세가 1950년 6월 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지난달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 특사는 한 외교·안보 전문지를 통해 2024년을 이렇게 내다봤다. 지난해 초부터 북한 매체에 등장하는 전쟁 준비 테마가 전형적인 허풍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재집권은 한반도 문제와 직결되는 중대한 변곡점이 된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가 ‘한국 방어’라는 미국의 기존 약속을 이행할지는 불투명하다. 미국의 확장 억제 강화를 명시한 워싱턴 선언 및 한미일 3국 공조가 헐거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
다른 한편으로 트럼프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직접 대화를 꾀할 가능성이 있다. 제재 완화를 대가로 핵 동결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관측이다. 북한도 이걸 노리고 있는데, 여기서 한국은 배제될 공산이 크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구성과 역할에 대한 조정도 예상된다.
우리 정부가 이 대목을 직시해야 한다. 모든 사안에서 관성적으로 미일 일변도 외교에 매달리는 건 위험하다. 중국과의 외교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등 위험 분산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고, 북한과의 군사 충돌 가능성을 줄이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체 방위력 확충을 통한 자강(自强)도 중요하지만, 미중 패권 다툼의 완충지대 확보를 위한 대외적 전략도 병행해야 한다.
트럼프의 대외 정책은 이익과 거래를 기반으로 한다. 과거 한반도 정세를 극한 대결에서 극적 대화로, 다시 긴장으로 흔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트럼프 2기는 더 독한 ‘시즌2’를 예고하고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철저한 대비만이 살길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4-02-0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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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부산 AI 어디까지 왔나
요즘 어딜 가나 ‘인공지능(AI)’이라는 말이 들린다. 2022년 11월 오픈AI 챗GPT가 선보인 지 불과 1년여. 인공지능은 우리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AI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산업, 의료, 교육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하면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전·IT제품 전시회인 CES2024에서도 신제품 키워드는 ‘AI를 통한 일상의 변화’였다. CES에 모습을 드러낸 실리콘밸리 빅테크의 ‘빅샷’ 경영인들은 “와이파이 기술처럼 AI가 고속 확산될 것”이라면서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삶의 질을 향상시킬 미래에 전율을 느낀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사람처럼 움직이고 학습하고 판단하는 AI 로봇도 등장해 고령화, 인구 감소 같은 글로벌 문제 해결과 함께 노동시장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AI 경쟁 무대에서 바라본 부산의 지역 경제는 그 변화가 더디기만 하다.
■부산 기업 AI 도입 부정적
지역 기업들의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에 대한 도입 실태는 실망스럽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지역 100개 기업 임원을 대상으로 ‘챗GPT 인식 및 활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챗GPT를 업무상 활용한 경우는 25%에 그쳤다. 또한, 69%가 챗GPT 활용 교육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67.6%가 챗GPT 유료버전이나 업그레이드된 AI 서비스 도입 의향이 없다고 대답했다. 기업경영 및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절반 이상(56.4%)이 부정적 시각을 보였다. 부산상의 기업동향분석센터 정상엽 과장은 “지역 기업 대다수가 제조업 등 보수적인 업종인 탓에 AI 신기술을 받아들이려는 욕구가 크지 않다”면서 “빠르게 대응해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지역 기업만 선도
앞서서 준비하는 기업도 눈에 띄고 있다. 전기자동차 모터 구동장치를 생산하는 코렌스이엠 조용국 회장은 “AI를 지금 현장에 적용하지 않으면, 인구 급감 시대를 맞아 5년 뒤 기업의 생존에 문제가 생긴다”라고 단언한다. 조 회장은 “AI 적용 관련 투자가 지체되면 인력 부족뿐만 아니라, 기술적 격차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코렌스이엠은 생산라인에 생성형 AI를 접목시켜 불량품 데이터를 축적한 뒤 AI 진단 모델을 통해 고장 발생을 예측하고 생산라인 중단 등을 최소화하고 있다. 품질지수, 알람 발생 빈도, 가동 시간, 수명 예측, 사용 횟수, 생성 데이터, 주기 관측 등 연관성을 AI로 분석해 도출된 결과를 통해 정비, 고장 수리 복구 스케줄 예측까지 하고 있다. 사무자동화에도 LLM(대규모 언어 모델), STT(음성 인식), OCR(광학 문자 인식)을 활용해 회의록 작성, 관련 기사 정리, 이력서 정리 등 일상 업무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사무직 노동력 투입 시간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였다. 코렌스이엠 조형근 대표는 “이제 AI가 없으면 생산에 문제가 생긴다는 게 현장의 판단”이라면서 “설비에서 축적되는 내부 데이터로 학습된 AI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자체 LMM(대규모 멀티모달모델)이나 생성형 AI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어묵 브랜드인 부산 삼진어묵도 생산 공정에 AI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울산 유니스트와 AI+X 프로젝트를 통해서 어묵에 들어가는 이물질을 걸러내는 데 AI를 집중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용준 대표는 “어묵의 주원료는 수산물인 연육과 고추 등 농산물이고, 어묵 밀도가 높아 이물질 검증이 쉽지 않다”면서 “금속 검출기와 엑스레이에 접목한 AI에 이물질 형상을 머신러닝 한 뒤 돌이나 나뭇가지, 심지어 낚싯바늘까지 검출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라고 밝혔다. 삼진어묵은 향후 전체 제조공정에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신선식품 물류 체계, 유통기한 관리, 발주량 예측 등에서도 AI를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뿌리 기업도 걸음마 단계
매출 30억대 규모의 뿌리 기업에서도 AI 도입은 시작되고 있다. 지역에서 자동차용 특수고무 성형 제조업을 하는 경평특수고무는 진공프레스 고무 성형기에 각종 센스를 부착해서 수집한 제조 데이터를 클라우드 기반 데이터센터로 실시간으로 축적한다. 이어 인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불량률을 낮출 수 있는 최적의 조합 데이터셋을 생성하여 최근에는 대학 연구소와 동종 업계에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클라우드 기반 인공지능 디지털 전환 플랫폼과 설비자동화 회사인 ㈜지에스티 오준철 대표는 “선진국 기업과 경쟁하거나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 생산을 위해서는 품질 신뢰성을 보증하는 센서를 통한 디지털 데이터를 가진 회사만이 경쟁력을 갖는다”면서 “산업 데이터를 가지고 산업현장에서 실제로 살아있는 AI 기반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마존 쇼핑몰을 통해 미국·일본·싱가포르 등지로 수출하는 발효소스제조 업체의 경우 고객 및 광고 데이터를 챗GPT를 통해 구축해 마케팅에 활용하는 경우도 등장하고 있다.
동의대 인공지능그랜드ICT연구센터 강영진 연구교수는 “챗GPT와 같은 초거대 AI 형태보다는 이를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분야로 지역 산업이 맞춰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동의대는 산학협력을 통해 재활용 쓰레기 감별기에 AI 비전 카메라를 부착해서 물체 선별 작업에 활용해 효율성을 높이거나, 용접에 관련된 데이터를 만들어 자동 스캐닝을 통해 품질 결함을 찾아내는 초기 AI 기술 사업화에 성공했다.
■인구 감소 대응 위한 생존 방안
코렌스이엠과 협업하는 최성철 부경대 시스템경영안전공학부 교수는 “AI 도입은 당장 눈앞으로 다가온 인구 감소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단언한다. AI 기반 자동화 플랫폼 학교기업 ‘팀리부뜨’를 운영하는 최 교수는 “청년 인구가 부족한 부산에서는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것보다는 부족한 인력 확보 대책으로 봐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역 기업들은 현장 근로자에서부터 무역 보조, 회계전표 관리 등 일반 사무직까지 구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런 추세는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챗GPT 등을 통해 이런 반복적인 사무보조 업무를 옮겨가야 한다는 것.
최 교수는 “AI를 도입하면 인력 구조조정이 아니라, 생산성을 높이고, 담당자가 나가더라도 업무 프로세스가 멈추지 않게 된다”고 조언했다. 또한, 최근 청년세대가 전표 정리 등 단순한 일을 오래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추세에서 AI 적용을 통해 사람이 좀 더 고난도의 업무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부연했다. 실제로 SM그룹 등 대형 해운회사 등에서 사람이 처리하던 전표 입력 등을 OCR과 LLM을 복합한 AI 모델로 해결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인구 감소 시대에 업무 프로세스를 AI에 맡기는 노력을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한꺼번에 산업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면서 “기술적으로 솔루션 개발이 가능해진 만큼 개인의 생산성을 늘릴 수 있다는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업 문화 변화도 필수
기술적인 발전과 함께 이를 기업에 도입하려는 진취적인 문화가 아쉽다는 쓴소리도 나오고 있다. 부산상의 정상엽 과장은 “지역 기업 임원 등 의사 결정권자들이 AI의 접목과 교육에 대해서 보수적인 탓에 대응이 느린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부산 산업계에 젊은 세대가 계속 빠져나가면서 기업 대부분에서 구성원 연령이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고령화된 기업 문화가 AI 등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래 세대에 맞지 않은 보수적인 뿌리 기업 운영 행태가 혁신을 가로막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지에스티 오 대표는 “부산 지역 기업과는 달리, 수도권 제조업체의 경우 공정 전체의 AI 접목과 디지털 전환으로 부산하다”고 강조했다. 부경대 최 교수는 “기업 의사 결정권자인 임원이나 대표들이 10년 뒤에 나타날 인구 절벽의 심각성과 품질 경쟁력 향상의 절실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AI 적용 지체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동의대 강 교수는 “지역 기업의 자금 사정이 어려우면서, AI 등에 투자해 기존 라인을 교체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산업의 디지털 전환에 대한 진취적인 문화 확산과 함께 지자체, 중앙정부의 지원 등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병철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4-01-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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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동훈의 '동료 시민'이 성공하려면
할리우드 SF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는 미래의 ‘지구연방’이 인류를 위협하는 외계 종족과 벌이는 사투를 다룬다.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건 ‘지구연방’이 계층 사회라는 점이다. 시민(Citizen)만 우주를 종횡무진하는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 투표와 공직 진출 등 공적인 일은 시민, 즉 예비역의 전유물인 데 반해 민간인(Civilian)은 공론에 참여할 모든 권리가 박탈되어 있다. 국민을 시민과 비(非)시민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원작 소설과 영화가 미래를 파시즘 사회로 상정했다고 한다. 이 영화가 단순한 SF 활극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국민과 시민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22대 총선 앞의 최대 풍운아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다. 검사에서 법무부 장관을 거쳐 집권 여당을 지휘하는 자리까지 2년이 안 걸렸다. 한 위원장은 정치 무대에 등장하면서 ‘동료 시민’이라는 낯선 개념을 들고 나왔다. 누가 ‘동료 시민’이고 누구는 아니냐는 비판적인 반응도 있다. 어쨌든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어장 관리’를 하면서 외연 확장 전략을 썼던 기존 정치권의 화법과 다르고 능동적 시민의 역할을 소환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민의힘’이지 ‘시민의힘’이 아닌 까닭
미국 대통령 연설문의 서두는 으레 ‘My fellow citizens(Americans)’로 시작한다. 보통 ‘국민 여러분’으로 번역되는데, 이 표현이 ‘동료 시민’의 원형으로 보인다. 한국어에서는 국민과 시민을 구분해서 사용하니, ‘동료 시민’은 서로를 평등한 구성원으로 여기고 책임을 강조하는 의미로 읽힌다. 위정자가 주권자를 통치 대상으로 볼 때 ‘국민’이 사용된 반면, 의기투합하는 대상으로 존중할 때 ‘시민’이 호명된다는 뜻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으로 칭하며 역할을 주문했을 때와 같은 맥락이다. 이게 공화정의 원리에 맞고 협치 시대에 어울리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는 길항 관계였다. 국가 통제가 시민 사회를 움켜쥔 곳, 즉 국가도(Stateness)가 높았던 과거 소련과 군국주의 일본, 현재 북한에서 시민 사회는 존재감이 없다. ‘국민’은 군주나 당의 지배에 일사불란하게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강제 암송해야 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시민 사회가 국가를 상대로 지난한 투쟁 끝에 목소리를 낼 공간을 확보하는 정도에 따라 민주화의 성패가 갈렸다. 한국 시민 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민 사회의 대척점에 있었던 보수 정당의 적자가 ‘국민의힘’이지 ‘시민의힘’이 아닌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그런데 시민 역할론의 기치를 보수 여당의 구원 투수가 꺼내 들었다. 혼돈 끝의 ‘비상 대책’으로 나온 것이긴 해도 그 자체는 시대의 변화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동료 시민’ 대 ‘패거리 카르텔’
한 비대위원장은 586세대(80년대 학생 운동권)와 민주당을 싸잡아 수구 기득권이라고 비판한다. 586이 민주당을 ‘숙주’로 이용하고 있다거나, 강성 지지층을 뜻하는 용어인 ‘개딸’을 인용해 “민주당이 개딸 전체주의가 됐다”고 민주당을 공격한다. 나아가 이런 민주당이 “동료 시민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며 척결의 대상이라고 좌표를 찍는다. 그러면서 비대위원을 789세대(70, 80, 90년대 생) 위주로 채우고 세대 대결 프레임까지 노린다.
‘개딸 전체주의’ 화법은 곧바로 한 위원장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국민의힘 초선 김웅 의원의 불출마의 변에 한 위원장이 답해야 할 질문이 들어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적 정당이 아니다. 당이 갈 곳이 대통령의 품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로 압축되는 대통령실의 당 장악이 전체주의적인 구태가 아니고 뭔가. 한 위원장이 수직적 당정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없으니 촉망받던 초선 의원이 절망하는 것이다.
이준석 전 대표의 탈당을 대하는 모습도 의문 투성이다. 두 번의 선거를 승리로 이끈 당 대표, 젊은 세대에 지지세가 있는 당의 자산이 탈당하려는데도 만류하기는커녕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비대위를 굳이 789세대로 내세운 취지가 무색해졌고, 민주당을 탈당한 5선의 이상민 의원을 직접 영입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과도 엇박자가 난다.
한 위원장의 인식은 윤석열 대통령의 ‘패거리 카르텔’ 척결론과 맞닿아 있다. 이권 카르텔로 지목된 곳은 586뿐만 아니라 건설 현장이나 학원가, 대학과 연구소의 R&D 분야 등 전방위적이다. 그런데 시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 대목이 있다. 군부 카르텔 하나회가 사라진 뒤 가장 위력적인 악폐 카르텔은 법조계에 있다. 검찰과 법원의 고위직이 퇴임 후 거액의 몸값을 받고 기업과 로펌으로 옮기는 전관예우 관행이 그것이다. 법조계 전관예우는 ‘패거리 카르텔’이 아닌가?
윤석열 정부는 언론과 야당, 시민 사회와 불통의 벽을 쌓고 있다. 대통령실은 수직적 당정 관계를 통해 집권 여당을 쥐락펴락해 왔다. 이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동료 시민’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는가? 한 위원장은 대답할 의무가 있다.
■‘윤석열 아바타’ 탈피, 통합의 정치 나서야
비대위원장 수락 때 운동권 야당을 향한 전투 태세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고 뜨악했다. 민주당의 허물만 보고 정치를 하면 당장 전선은 명확하겠지만 미래가 없다. 집권 여당을 이끌게 되었으니 국가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게 우선이지 않았을까?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한 입장도 처음엔 고심하는 듯하더니 대통령실 거부 방침이 나오자 설득을 포기하고 불가 방침을 굳혔다. ‘윤석열 아바타’라는 비아냥을 자초하고 만 셈이다. 뉴라이트를 넘어서는 ‘영 라이트’나 ‘넥스트 라이트’라는 기대감이 무색하다.
전신인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을 치를 때를 복기해 보라. 청와대의 공천 개입이 거세지자 참다 못한 당시 김무성 대표는 지역구인 부산 영도로 잠행해 파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옥새 들고 나르샤’ 파문이다. 선거 결과 제1당 자리는 잃었지만 당에서 그 정도라도 저항한 덕분에 ‘폭망’을 피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술 안 마시는 윤석열’ 정도의 뜨뜻미지근한 차별화 말고 아바타 그림자를 확실히 걷어내야 당도 살고 대통령도 산다.
집권 여당 비대위원장으로서 야당 지도자의 목숨을 노린 정치 테러가 발생한 작금의 정치 현실에도 무거운 책임이 있다. 원인은 누구나 알듯 증오의 극단화다. 언제부턴가 여의도에는 우리 편과 적을 구분하는 진영 논리만 횡행하고 통합의 가치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우리 민주공화정은 모두가 ‘동료 시민’이다. ‘동료 시민’의 미래를 위협하는 진짜 적은 ‘동료 시민’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려는 세력이다. ‘동료 시민’ 구호를 갈라치기의 도구로 쓸 것인가, 함께하는 통합의 정치에 활용할 것인가. 정치인 한동훈의 명운이 걸려 있는 갈림길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4-01-1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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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강제동원 피해 배상 대법원 판결 이후
지난 21일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에 동원된 피해자와 유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 준 원고 승소 판결의 여파가 계속되는 분위기다. 2018년 대법원의 1차 배상 확정판결 이후 일본 기업의 위자료 지급을 결정한 두 번째 최종 결론이 나면서 일본 전범기업들에 대한 배상 책임 인정은 우리 대법원의 입장으로 거의 굳어진 느낌이다. 대법원의 연이은 원고 승소 판결은 현재 비슷한 사안으로 계류 중인 약 70건의 관련 소송에도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특히 일제의 강제노역에 대한 최종 판결은 우리나라 정부와 일본 정부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합의의 틀을 근본부터 뒤흔들 가능성이 높다. 지난 3월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합의한 ‘제3자 변제안’은 물론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위변제 공탁 문제가 최대 관건이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정부의 해법이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한일 관계마저 다시 변곡점을 맞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제3자 변제 기금도 부족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의 위자료 지급을 판결했음에도 피해자들이 현실적으로 직접 배상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 정부의 변함없는 완강한 입장도 그렇지만, 지난 3월 이미 우리 정부가 한국 기업의 출연금을 바탕으로 대신 지급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인데,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수혜를 입은 포스코 등 국내 기업이 출연한 기금을 행정안전부 산하에 설치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이름으로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피해자들이 재단의 배상금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있어야 유효하다. 피해자들이 이를 거부할 경우 추가로 법적인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제3자 변제를 위해 지원재단에 모금된 액수는 41억 원가량이다. 이 중 2018년 판결에 따라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한 피해자 11명에게 25억 원가량이 지급되고, 16억 원 정도가 남았다. 그런데 당시 승소한 원고 15명 중 생존자 2명을 포함한 4명은 이를 계속 거부하고 있지만, 이들의 몫으로 약 10억 원을 할애하고 나면 잔금은 5억 원에 불과하다. 올해 2차 판결에 승소한 11명의 배상금까지 고려한다면 기금 액수 자체가 크게 모자라는 형편이다.
‘대위변제 공탁’은 계속 제동
지원재단의 기금 부족보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들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상과 관련해 전범기업은 물론이고 일본 정부의 어떠한 사과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 정부가 조성한 기금을 받는다는 것이 피해자 입장으로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정부가 택한 우회로가 법원에 배상금을 맡기는 대위변제 공탁이다. 공탁은 채무자가 채권자가 아니라 법원에 돈을 맡김으로써 빚을 갚은 것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다. 정부가 분명하게 제3자 변제금의 수령을 거절하는 피해자들에게 채무 변제 이행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법적 절차를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시도는 법원에 의해 모두 막힌 상태다. 지원재단을 통해 변제금을 공탁하려던 시도는 법원에 의해 모두 거절당했다. 이 같은 불수리 결정에 불복해 법원에 12차례나 이의신청을 했지만, 역시 단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해 기업이 불법 행위 자체를 부인하며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채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신청인(재단)이 제3자 변제를 통해 판결금을 변제한 뒤 가해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가해 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지난 8월 수원지법 안산지원이 결정문을 통해 밝힌 기각 사유이다. 피해자들이 제3자 변제금 수령을 거절하는 이유와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뤄본다면 공탁 제도를 활용하는 방안은 실패했다고 여겨진다. 결국 현재 진행 중인 관련 항소심이 대법원까지 가서 최종 결론이 나와야 해결될 것이다. 어쨌든 법원의 변제금 공탁 거절과 이의신청 기각만으로도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이 큰 타격을 받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은 “한국 정부 책임” 떠넘겨
대법원 판결 이후 우리 정부의 입장만 더 궁지로 몰리는 모양새다. 제3자 변제 방식을 비판하던 국내 여론은 물론 일본 정부로부터도 유·무형의 압박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 정부는 대변인을 통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한일청구권협정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라며 제3자 변제 방안에 따른 우리 정부의 해법을 촉구했다. 또 주일 한국대사관 정무공사를 초치하며 거듭 압박을 가했다. 외교가에서는 이를 두고 상대국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공개적인 거론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고, 또 상대국에 부담을 지우는 의도라고 해석한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제3자 변제의 이행을 계속 노력하겠다고 대응했다.
우려되는 점은 우리 정부가 앞으로도 계속 일본 정부의 이런 요구에 끌려갈 공산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일본 정부나 전범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물론 한국 내 여론을 위해 어떠한 ‘호응 조치’도 내놓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 3월 박진 외교부 장관이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면서 “물컵에 비유하면 물의 절반이 찼다고 생각한다”며 일본 정부와 기업의 호응을 유도했지만, 지금까지 일본은 단 한 방울의 물도 보태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무대응에다 국내에서도 제3자 해법이 지지받지 못하고 계속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면 현 정부의 대일 행보 자체가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일방적인 양보에도 변하지 않은 일본의 무대응이 우리 정부의 대일 외교에 대한 불만으로 충분히 번질 수 있는 것이다. 기대했던 물컵의 반이 여전히 빈 채로 남아있을 경우 현재의 한일 미래 파트너십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최근엔 일본 내에서도 이를 주시하는 분위기다. 한국 정부가 법원 공탁을 계속한다는 입장이지만, 현 정부 임기 끝까지 이 문제가 어떻게 확정될지 불분명하고, 또 앞으로 승소할 원고 중 정부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더 늘 것으로 일본 언론 매체들은 예상했다. 특히 공탁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침이 한국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면 제3자 변제라는 틀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결국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호응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현재 일본의 태도를 보아서는 이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우리 정부가 통 큰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만 궁지에 몰리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안정적인 한일 관계는 기대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email protected]
2023-12-2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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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크루즈 관광 개발
관광 욕구 다양화와 맞물려 해양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점점 높아지면서 해양 관광, 특히 크루즈에 대한 관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엔 ‘남해안 관광벨트 구축’과 연계해 관련 지자체에서도 크루즈 관광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경남도는 이달 초 크루즈 관광 활성화 기반 구축 용역에 들어갔다. 경남도는 이번 용역을 통해 연안 크루즈 상품화 전략 구체화 등 크루즈 관광 산업의 다각적인 발전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4월에는 전남도가 남해안 해양레저관광활성화 차원에서 전남-경남-부산을 잇는 크루즈 항로를 개발하고, 여수와 목포 등에 크루즈 터미널·전용부두 등 크루즈 관광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 해양수산부와 남해안권 3개 시도(부산·경남·전남)는 남해안을 대표적인 해양레저관광벨트로 조성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했다.
부산시도 연안 크루즈에 대한 구체적인 활성화 방안을 내놓을 때가 됐다. 부산지역 여행업계와 관광업계 일각에서는 크루즈 산업에 대한 지자체들의 좀 더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남해안(부산·경남·전남) 크루즈 시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느 때보다 크루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주변 환경 여건도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해안 관광 활성화의 지렛대가 될 남해안 크루즈의 성공 조건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지자체들이 남해안 관광 사업의 하나로 연안 크루즈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혹여 그 달콤함이나 장밋빛 전망 뒤에 놓치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이나 문제점은 없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잠재력은 있나?
남해안은 크루즈를 비롯한 각종 해양관광상품 개발이나 이용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해안 광역권을 운항하는 크루즈는 없다. 단지 부산, 거제, 통영, 창원, 사천, 여수, 목포 등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소규모 크루즈나 유람선 형태로 운항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남해안 크루즈에 대한 관심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남해안은 타 도시에 비해 관광 여가 활동을 하기에 이상적인 기후에다 청명 일수도 타지역보다 많아 크루즈 관광에 유리하다. 섬이 많아 배 운항이 힘든 단점은 있지만, 리아스식 해안, 광활한 갯벌 등 천혜의 자연환경도 갖췄다. 여기다 남해안 일원의 풍부한 문화 역사 유산은 크루즈 관광상품으로 충분한 매력을 지녔다. 이곳엔 크루즈 등 각종 해양관광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관련 산업체를 비롯해 세계적인 조선업체도 입지해 있다. 중국과의 접근성을 비롯해 800만 명에 달하는 내부 잠재 관광 수요도 있다. 중국-일본-대만을 잇는 이른바 동북아 해상 수송의 지름길로 세계 정기 크루즈 항로 개설 측면에서도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이에 남해안 일원에 크루즈를 도입, 우리나라 해양관광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 남해안 크루즈는 지역 관광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블루오션이 될 확률도 높다. 10년 전 부산연구원이 펴낸 ‘남해안 연안 크루즈 도입 방안’ 자료에 따르면 응답자의 86%가 남해안 지역에 크루즈가 운항한다면 향후 탑승할 의사가 있다고 대답했을 정도다.
■크루즈 운항지는
부산은 유람선 사업이 비교적 발달해 있긴 하다. 하지만 국내 타지역 상황과 큰 차이가 없어 크루즈사업이라 하기에 민망할 정도다. 그나마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인 팬스타드림호(2만 1688t)는 매주 주말에 정기적으로 승객 200여 명을 태우고 주말 ‘부산항 원나이트 크루즈’ 운항을 하고 있다. 일종의 항내 크루즈인 셈이다. 배는 한일 간 운항이 없는 주말 부산항 1부두-조도-태종대-오륙도-해운대(동백섬)-광안대교 구간을 운항하며 부산 앞바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오전 부산항 1부두로 돌아온다.
이처럼 항내 크루즈 형태는 남해안 연안 도시 중에서도 일부 운영된다. 하지만 광역권 연안 크루즈는 인프라가 전무한 실정이다. 이는 역으로 남해안 크루즈 산업은 경제성 확보가 충분히 가능하단 얘기다. 그렇다면 크루즈 운항지는 어디가 좋을까? 부산의 한 여행업계 관계자는 부산-통영(거제)-남해-여수 코스를 추천했다. 운항 시간은 6시간 정도 된다. 운항 코스는 향후 여건 변화, 사업 추진 용이성 등을 고려한 전문가 평가를 통해 선정하면 된다. 운항 경로를 부산-통영-여수로 대폭 줄일 수도 있고, 부산-통영-남해-여수-목포로 운항 범위를 넓힐 수도 있다. 부산 연안 1박 2일 또는 그 이상의 일정을 자유로이 선택해 여행할 수도 있다.
■파급 효과와 저해 요인
크루즈 관광 산업은 조선·해운 산업, 해양 관광, 내륙 관광 등 다양한 분야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종합 산업이다. 따라서 남해안 지역 해양 관광 발전에 있어 촉진제 역할과 함께 우리나라 해양 관광 산업 전반에 걸쳐 직·간접의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일반 여객선과는 달리 크루즈선 내부에는 수많은 종사원이 근무하게 돼 직·간접적인 고용 창출 효과 또한 기대할 수 있다. 지역 경제에 미치는 연관 효과도 높다. 이를테면 크루즈 육상 연계 프로그램에 따른 배후권 쇼핑관광산업 활성화 등이다.
국내 조선업계의 크루즈선 건조에 대한 기술개발, 국내 특수조선 기술의 발전 촉진, 중소 조선업체 고용 창출 효과뿐만 아니라 크루즈 선박의 보수·유지와 각종 선용품 생산에 필요한 간접적인 고용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다. 크루즈 기항지 입장에서는 관광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관광 관련 시설과 관광 지원 기능을 개선하는 효과도 있다.
장밋빛만 있는 건 아니다. 걸림돌이 많다. 우선 국내 크루즈 시장이 발전하려면 규제를 대폭 정비해야 한다. 국내 크루즈 산업은 아직 초창기기 때문에 법과 제도의 정비가 완벽하지 않다. 크루즈 사업을 위한 인허가 절차가 매우 복잡해 현행 법이나 제도적인 측면에서 연안 크루즈 관광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열악한 편이다. 연안 크루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상 유람선을 포함하는 단일화된 크루즈 관련법 제정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법규의 간소화와 함께 연안 크루즈 선내 시설에 대한 규제 완화도 시급하다. 이는 민간사업자의 크루즈 관광 사업 진출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답 있다
팬스타드림호가 부산항을 한 바퀴 도는 데도 기름값 등 자그마치 5000만 원 정도의 부대 비용이 발생한다. 크루즈 특성상 대규모 투자와 비용이 들어가기에 민간 투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초기 단계의 연안 크루즈 관광 산업에 대해 국가 정책 또는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민간 기업의 크루즈 사업 초기 투자 시 금융·세제에 대한 행정지원과 함께 크루즈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도록 유류비에 대한 면세유 적용, 선내 부대시설 인·허가 절차 간소화 등 크루즈 투자 업체의 부담을 덜어 줄 유인책도 필요하다. 여행사가 선박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정책 자금을 저리로 융자하는 등의 지원도 있어야 한다.
남해안 크루즈 사업은 남해안권 광역 지자체가 공동 참여하는 컨소시엄 형태를 통해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사회기반시설의 하나인 크루즈 터미널 조성과 크루즈 선박 구입은 지자체(부산·경남·전남 공동 투자)에서 담당하고, 크루즈 운영은 공개 심사를 통해 전문성이 높은 공공 기관이나 민간 사업체에서 조건부 위탁 운영하는 방식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남해안에는 천혜의 자연 유산과 역사 문화 자산이 풍부해 차별성 있는 정기 크루즈를 도입한다면 발전 잠재력이 매우 높다. 이에 성공을 위해서는 남해안 크루즈 선박의 안전성은 기본이고 상품에 대한 신뢰, 차별화가 필요하다. 남해안 크루즈 기항지에서 하선했을 때 내륙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볼거리, 즐길 거리 등을 찾아내 이를 관광 상품화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특화된 크루즈 내륙 연계 상품을 해당 지자체와 공동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갖춰질 경우, 남해안 크루즈 관광에 대한 수요는 높아지고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달식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3-12-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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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난무하는 신당 바람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신당 추진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다. 이 대표는 다음 달 27일까지는 신당의 윤곽을 구체화할 것이라고 밝혀 놓은 바다. 국민의힘에선 유승민 전 의원에 대해서도 신당 가능성이 점쳐진다. 야권에선 금태섭 전 의원이 늦어도 다음 달 초까지 신당 창당을 예고했다. 양향자 의원은 지난 8월 이미 한국의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신당을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정의당 일부와 녹색당 등 진보 계열 쪽에선 선거연합정당을 구상 중이고, 특히 용해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개혁연합 신당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신당도 심심찮게 거론된다. 친이낙연계 민주당 원외조직의 신당이 만들어진다는 소문도 있다. 말 그대로 우후죽순이라 어지러울 정도다.
■극히 드문 성공 사례
신당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한국 정치사에서 숱한 신당들이 명멸했지만 성공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14대 총선에서 31석을 가져간 통일국민당, 15대 총선에서 50석을 확보한 자유민주연합, 20대 총선에서 38석을 차지한 국민의당이 있을 뿐이다.
통일국민당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2년 창당했고,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민주자유당에서 떨어져 나와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 주도 아래 만들어진 당이었다. 국민의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안철수 의원과 호남 정치인들이 손잡고 창당했다. 정리하자면, 세 당의 성공은 거물급의 대표 주자, 충청이든 호남이든 탄탄한 지역 기반, 막대한 자금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신당 추진 세력들에게선 그런 요소들을 찾기 어렵다. 우선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나 유승민 전 의원은 여당에서 비주류다. 두 사람에 대해서는 국민의힘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결과 신당으로 도피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런 평가는 야권의 금태섭 전 의원이나 양향자 의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양 의원의 경우 과거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을 정도로 민주당과 인연이 깊지만,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국면에서 당론에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 갈라섰다. 민주당 원내부대표를 맡았던 금태섭 전 의원도 줄곧 민주당 지도부와 각을 세우다 탈당했다. 송영길, 추미애, 조국 등의 신당설은 명예회복 내지는 복권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겐 적어도 현재로선 민심을 사로잡을 카리스마가 없다. 과거 대권주자 반열에 있던 정주영이나 김종필, 안철수 같은 무게감을 느끼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창당에 필요한 세력 형성조차 어려워 보인다. 지역 기반이 확고한 것도 아니며, 창당 과정이나 선거 때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폄하? 그럼에도 기대!
이러한 이유들로 신당이 태동하기는 어려우며, 창당하더라도 총선에서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것이라며 신당 추진 움직임을 폄하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신당이 정치 현실에서 갖는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속내에는 신당 출현이 자신들에게 타격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국민의힘은 지지 기반인 보수표가 갈라질 것을, 민주당은 비명계의 탈당으로 인한 당 분열을 우려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신당에 거는 국민적 기대다. 근래 여러 여론조사를 간추려보면 지지할 정당이 없다는 국민이 열에 서너 명 꼴이다.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사람들도 대개는 속으로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거대 양당 체제에 대한 실망이 워낙 커서, 확실한 대체재만 있다면 언제든 바꾸고 싶어 한다. 이때의 대체재는 참신하고 능력 있는 신당이 될 수 있다. 국민들은 이왕에 출범할 신당이라면 그 신당이 낡은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비전의 정치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정치개혁 추동해야
그러나 그 누구가 신당을 만들든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을 반영하지 못하면 신당은 설사 출범하더라도 종국엔 말짱 도루묵이다. 기존 정당들과 차별화된 목표와 가치를 제시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뚜렷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선동이나 바람몰이가 아니라 대안 세력으로서 강단 있는 비전을 보여줄 때 비로소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당 바람을 틈타 정치적 이득을 노리는 야합에 그친다면 얼마 못 가 소멸할 뿐이다.
역대 총선을 앞두고 나타났던 신당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부동산 시장의 떴다방처럼 잠깐 반짝하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말이 신당이지 실은 정치낭인들의 이합집산이었거나, 제법 규모를 갖추었다고는 해도 기존 정당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통일국민당과 자유민주연합, 국민의당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으나 결국 단명했던 게 좋은 예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은 다름 아닌 정치개혁이다. 요컨대, 신당이 성공하려면 과감한 도전으로 정치개혁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정치 현실에 비춰 지나치게 순진하고 허황한 기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우후죽순 나타나는 신당들 속에서 옥석을 가릴 능력은 충분히 갖고 있다.
■선거제 퇴행 안 돼
신당에 대한 이런 기대도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바뀌면 만사휴의다. 지난 21대 총선부터 시행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지금 문제다. 연동형은 특정 당이 지역구 당선자를 못 내더라도 정당득표율만큼의 의석수를 비례대표로 채워준다. 준연동형은 채워주는 비례대표 숫자를 일정 부분 제한한다. 거대 정당의 의석 독점을 막고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돕자는 취지다. 여야가 이미 소선거구제를 확정한 마당이라 신당을 비롯한 소수정당이 원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뿐이다. 현행 준연동형에서는 최소정당득표율(3%)만 달성하면 원내 의석 배출이 가능하다.
연동형의 부작용은 위성정당이다. 21대 총선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위성정당을 만들어 전체 비례의석 47석 중 36석을 차지했다. 일종의 편법이자 표심 왜곡이었다. 국민의힘은 과거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병립형은 정당득표율만큼 비례의석을 배분하기 때문에 위성정당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명분에서다. 이는 결국 거대 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승자독식 구조를 깨뜨리지 말자는 것이다. 표 계산을 하는 민주당도 병립형 쪽으로 살짝 기우는 모양새다.
신당 창립 문턱을 낮추면서 위성정당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래서 나온다. 민주당 이탄희 의원 등이 준연동형을 유지하는 대신 별도의 위성정당방지법을 제정하자는 게 그 하나다. 이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정치개혁의 우선 과제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를 종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신당처럼 소수라도 다양하고 참신한 세력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해야 한다. 선거제도가 퇴행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3-11-2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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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K포퓰리즘’이라는 막장 드라마, 알고 봐야 안 당한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복국집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붉혀 화제가 되었다. 지난 6일 안 의원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복국집에서 기자들과 식사하다 이 전 대표의 뒷담화를 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옆방에 이 전 대표가 자리를 잡아 이날 이야기가 다 들렸다고 한다. 이 전 대표가 “안철수 씨, 조용히 하세요”라고 고함을 쳤고, 안 의원은 잠깐 멈칫했지만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는 게 사건의 전말이다. 앙숙이라고 불리는 이 두 사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다. 이 전 대표는 가끔 품성 논란에 휩싸이지만, 신당 창당 여부로 요즘 가장 핫한 인물이다. 대선후보까지 했던 안 의원이 훨씬 더 손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 의원은 요즘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지나고 나니 그날 해프닝은 대한민국 보수를 대표하는 신구 포퓰리스트가 세대 교체하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뜨는 이준석 vs 지는 안철수
2012년 대선에서는 ‘안철수 현상’이라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서울시장을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한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당시 오랫동안 대권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박근혜 후보를 누르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조기숙 교수는 안철수 현상을 연구해 2016년에 〈포퓰리즘의 정치학〉을 출간했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기이한 현상이라는 안철수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종종 목격되는 포퓰리즘 현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특히 안철수의 포퓰리즘이 미국의 로스 페로와 매우 유사성을 보인다고 지적한 부분이 흥미롭다. IT업계 인물인 페로는 재산이 도널드 트럼프보다 많았다. 그는 1992년과 1996년 미 대통령 선거에 나서 각각 빌 클린턴에게 패배했다. 미 대통령 선거에 제3후보로서 10% 이상의 득표를 확보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2019년에 사망한 그는 중도 정치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포퓰리즘 성향의 비주류 정치인이었다.
현재 보수 진영 포퓰리즘의 선두 주자는 이준석이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맞서는 포지션을 취하며 매일 같이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사실 여당 대표에서 무참하게 쫓겨나는 모습에 원래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긴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대선 때 '이대남'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대 갈등과 남녀 갈등을 앞장서서 조장했다. 20대를 남녀로 갈라치고 이대남들의 반페미니즘 정서를 활용하기 위해 여성가족부 해체를 대통령 공약으로 내놓았다. 장애인 단체의 시위에 대해서도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한다”고 몰아붙인 이다. 갈등을 부추겨 표를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짜 민주주의 대변자”
정치학자들은 포퓰리즘을 정치의 방식으로 규정한다. 카스무데와 크리스토발 칼트바서 교수는 〈포퓰리즘〉에서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두 진영,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 그리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중심이 얇다는 표현은 다른 이데올로기와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포퓰리즘은 다른 이데올로기에 들러붙는 형태를 띤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사회주의와 결합시키고,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민족주의와 결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을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가 말한 것처럼 “적과 친구의 구별”로 보기도 한다. 한국은 팬덤 정치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포퓰리즘 정치가 자라날 최적의 환경을 갖추게 됐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의 저자 조귀동이 “권력 분립, 법치주의,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집단에 대한 관용 등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원칙은 무시된다. 선거용 정당을 만들지 않고 기존 정당을 장악한 뒤, 해당 정당을 포퓰리즘 정당으로 바꾸는 사례도 여럿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한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포퓰리즘 정치세력은 자신들이 진짜 민주주의의 대변자라고 주장하며 국민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길 좋아하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정부와 여당이 최근 연이어 내놓는 정책들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수도권 경쟁력 확보를 명분으로 내놓은 ‘서울 메가시티’ 방안이다.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낸 게 1966년이다. 서울은 이미 너무 메가(mega·거대한)인데, 서울 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김포시를 서울에 편입하겠다는 주장은 가당찮다. 국민의힘 소속 유정복 인천시장이 입바른 소리를 했다. “이제는 정치공학적인 선거 '표퓰리즘'을 퇴출시켜야 할 때다. 선거를 5개월여 앞두고 신중한 검토나 공론화 없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이슈화하는 것은 국민 혼란만 초래하는 무책임한 일”이라는 말이 백번 맞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헌법적 가치는 어디로 갔나.
공매도 금지 조치도 그렇다. 경제위기 상황이 아닌데 정부가 공매도 전면 금지를 내놓는 전례가 없다. 세계 3대 투자자로 불리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은 “공매도 금지 조치는 실수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기 때문에 한국은 메이저 국제 금융 중심지가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블룸버그까지 이번 공매도 조치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나온 것으로,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하고 있다. 공매도 금지는 개인투자자 표를 얻기 위한 금융 포퓰리즘의 하나로 볼 수밖에 없다.
가장 기가 막힌 건 식당과 카페에서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던 조치의 철회다. 환경부는 자영업자들의 비용과 인력 부담을 이유로 들지만 누가 봐도 자영업자들을 의식한 총선용 선심이다. 오죽하면 〈조선일보〉까지 “아무리 선거용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라고 비판하고 나섰을까.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를 조기 착공해 수도권 30분 통행권을 강원·충청까지 확장하고, 노후 도시 지원 특별법도 연내 통과시킨다고 한다.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라는 유명한 드라마의 대사가 생각이 난다.
무책임한 인기 공약 알면서도 따라가
누가 포퓰리스트일까. 이들의 특징은 제도에 대한 불신과 함께 기득권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다는 점이다. 정치인보다 비정치인이 포퓰리스트가 되었을 때 더 큰 인기를 누리는 것도 이유도 있다. 과거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부채가 없어 현실 정치 비판에서 더 설득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들의 의외의 특징이 권력의지다. 이들은 시대와 국민의 소명을 받아 마지못해 정치를 하지만 정치 참여 자체를 내켜 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는 권력의지가 없어 보이는데도 출마를 굽히지 않는 강한 권력욕을 보여 주니 양면적인 권력의지를 가졌다고 하겠다.
물론 국민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치를 하려는 포퓰리즘을 반드시 나쁘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포퓰리스트가 무책임한 공약으로 인기를 얻게 되면 기존 정당의 후보들도 할 수 없이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공익에 손해가 되는 정책이 그 사회를 지배하게 되기에 민주주의에 해악이 된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등에서 집권했던 남미 포퓰리스트들은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았다.
요즘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가져오는 가장 큰 요인은 매스컴의 발달이다. 포퓰리스트는 모두 매스컴을 기가 막히게 활용한다. 우리 사회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라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스트에게 이끌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박종호 수석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3-11-15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