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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반음계 / 고영민(1968~ )
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 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시집 〈사슴공원에서〉(2012) 중에서
해가 설핏 기우는 오후가 되면 세계는 글썽이는 풍경이 된다. 천지는 ‘꾸다 만 꿈처럼’ 몽롱하고 아득하여 구름마저 ‘물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하는 기이한 순간. 세상의 한 가운데에 들어있는 것 같은데, 자꾸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 같아 주위를 휘둘러본다. 허전함이 내내 사무치면서 막막함에 한없이 휘어지는 눈길.
아, 나는 사랑을 잃었구나! 생명의 정수를 잃어 세계가 이리 처연하구나! ‘바람을 타고 오는 참외 향기가 안쓰럽’고, ‘하늘을 날던 새도 우수수 떨어진다’. 나의 외로움이 세계의 쓸쓸함으로 전화되어 온 우주는 황홀한 슬픔을 연주해 내는 ‘반음계’의 장막! 정말 ‘저녁이 오고’ 있다. 잃어버린 그리움을 찾을 수 없는 시간의 문턱에 내가 서 있다. ‘울어야겠다’. 내 청춘의 시기에 늘 눈썹 끝에 달고 살았던 어스름으로 글썽대야겠다. 김경복 평론가
2024-06-0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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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5월 어느 날
산다는 것이
어디 맘만 같으랴.
바람에 흩어졌던 그리움
산딸나무 꽃처럼
하얗게 내려앉았는데
5월 익어가는 어디쯤
너와 함께 했던 날들
책갈피에 접혀져 있겠지.
만나도 할 말이야 없겠지만
바라만 보아도 좋을 것 같은
네 이름 석 자.
햇살처럼 눈부신 날이다.
-시집 〈내게 말 걸어주는 사람들〉(2021) 중에서
헤어진 연인을 다시 보게 되는 일은 참 쓸쓸한 일이다. ‘만나도 할 말이 없게’ 되는 그 이상한 거리감, 그 어색함. 한때 얼마나 사랑한다고 되뇌고 주억거렸었던가! 사랑의 기억들은 ‘책갈피에 접힌’ 화첩처럼 애틋하게 남아 있지만, 헤어진 시간은 입을 막고 눈을 가려 사람을 주춤하게 한다. 먹먹한 마음 위로 쏟아지는 저 ‘5월의 눈부신 햇살’에 찡그린 웃음을 짓고 돌아서고야 마는 인연의 멍울.
사랑의 깊이는 헤어진 시간으로 잴 수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던 ‘네 이름 석 자’도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간다. 어디에도 사랑했음을 증명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퇴색한 그리움 속에서 5월의 ‘산딸나무 꽃이 하얗게 내려앉’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쓸쓸함이 물처럼 차오른 가운데 ‘햇살처럼 눈부신 날’은 왜 길기만 할까? 무심한 5월이 하염없다. 김경복 평론가
2024-05-2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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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병산 우체국 / 서일옥(1951~ )
이름 곱고 담도 낮은 병산 우체국은
해변 길 걸어서 탱자 울을 건너서
꼭 전할 비밀 생기면
몰래 문 열고 싶은 곳.
어제는 봄비 내리고 바람 살푼 불더니
햇살 받은 우체통이 칸나처럼 피어 있다.
누구의 애틋한 사연이
저 속에서 익고 있을까.
-시집 〈병산 우체국〉(2016) 중에서
가고 싶어라 ‘병산 우체국’. 보고 싶어라 ‘칸나 우체통’. 내 마음의 깊은 곡절을 봉인해 두고 싶은 곳. 그곳에 ‘애틋한 사연’을 넣어 두면 곡절은 저 홀로 ‘익어’ 내 사랑의 절절함을 보여주리라. 그대에게 가기 위해 ‘해변 길 걸어서 탱자 울을 건너서’ 설레며 걷던 길들, 늘 손끝에 따뜻하고 정겹게 맴돌던 ‘비밀’의 글들. 만나기까지 마음 절로 향기로워져 끝내 닿게 되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병산 우체국’에 있다. 풋풋한 내 젊음의 푸른 약속이 잠들어 있다. 세월을 거슬러 ‘몰래 문 열고 싶은 곳’의 모습으로, ‘담도 낮은’ 낯익은 풍경으로 서 있는 내 그리움의 비경(秘境). 그곳은 영화 ‘화양연화’ 속의 주인공이 홀로 앙코르와트 성벽 속에 제 사랑의 비밀을 봉인해야 했던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제 ‘안’에 밀봉해 둘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 준다. 홀로 된 사랑도 저 홀로 발효하여 쓸쓸한 향기로 무르익어 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처럼. 김경복 평론가
2024-05-2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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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고사(古寺) 1 / 조지훈(1920~1968)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시집 〈청록집〉(1946) 중에서
마음이 고요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세상은 밝고 환하게 켜졌다가 점차 어슴푸레하게 기울어 간다.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지’듯, 그냥 하루가 영글었다가 이울어 간다. 세상도 고요할 뿐이다.
슬픔인가? 아니면 기쁨인가? ‘말이 없이 웃는’ 것은 무슨 감정일까? 정밀(靜謐), 고요하여 편안함! 누구는 이를 심심상인(心心相印)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순진하기만 한 ‘졸음’을, 어리석고 가엽기만 한 ‘잠’을 지긋이 바라보고 ‘웃으시는데’, 오늘은 석가탄신일, 어디로 ‘꿈’의 머리를 두어야 할까? 고요하여 빽빽한 하루, 외로운 한낮, 낮잠을 자다 흠칫 깨어보면 세상은 몽롱한 꽃잎, 꽃잎, 붉게 물든 황혼이 되어 낱낱이 떨어지고 있다.
김경복 평론가
2024-05-1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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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팬지꽃으로
하루하루 눈물방울로 꽃을 피우는 월셋방 우리 집이 얼음덩이 속에 사는 에스키모보다는 더 행복할 거라고 딸애는 잠 못 드는 밤이면 울면서 기도하였어요.
때로는 거지옷 입은 개그맨과 신데렐라 공주가 함께 출연하는 흑백 TV에 나온 적도 없는 아빠는 〈바본가 보다, 바본가 보다〉며 까르르 놀려대더니 딸애는 풍선을 불며 뒷산으로 가 버렸어요.
세모꼴 다섯모꼴의 찌그러진 별들과 나뭇잎과 흙, 볏짚으로 쏘아올린 꿈 속의 우리 집 그리고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엄마의 젖가슴과, 또 그런 것들이 꽃바구니에 가득 그려진 빨간 풍선을 하나 들고, 심심한 아홉 살 딸애가 떠나버린 자리에는 딸애 얼굴 같은 팬지꽃 한 송이가 저 혼자 피어 있었어요. 그것도 목이 쉬어 피어 있었습니다.
-시집 〈팬지꽃으로〉(1987) 중에서
슬픔이 맑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시라서 그럴까? 아니다. 좀 더 엄밀히 들여다보면 어린아이의 슬픔이 천진난만하면서도 애잔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서 그렇다. 슬픔은 하염없는 눈물로 우리의 흐린 마음을 씻어 낸다.
엄마를 잃고 아빠와 가난하게 사는 어린아이는 무슨 마음으로 살아갈까? 그 아이의 하루하루는 ‘신데렐라’, ‘개그맨’ 등이 나와 노래하고 이야기해 잠시 서러움을 잊기도 하겠지만, 아빠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까르르 놀려댈’ 웃음을 짓기도 하겠지만, 슬퍼라, 채울 길 없는 허기에 늘 그늘이 져 있었으리라. 그것을 보는 아빠 또한 여린 ‘팬지꽃으로’ 시들어 가는 딸의 모습을 처연히 바라보아야만 하였으리. 하여 ‘목이 쉬어 피어 있는’ 팬지꽃은 얼마나 눈물 나는 아픔이랴, 얼마나 눈물 나는 그리움이랴!
김경복 평론가
2024-05-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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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윤사월(閏四月)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시집 〈청록집〉(1946) 중에서
슬픔이 깊어지고 깊어지면 맑아진다. 해맑은 웃음 속엔 언제나 슬픔의 향취가 은은하게 풍긴다. 봄의 어여쁨 속엔 겨울의 삭막한 한기가 보글댄다. 생동하는 신록 너머로 어룽대는 저 아지랑이는 아픈 날들을 정화하는 표지일 것이다.
‘눈먼 처녀’가 듣는 ‘꾀꼬리 울음’ 소리가 그러하지 않을까? 맑고 고요하여야 들려오는 봄의 소리는 오직 한 길로 전해오는 생명의 신비다. 아니 깊고 깊은 외로움 속에서야 침전되는 영혼의 파장이다.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넓고 깊은 가청(可聽) 세계를 가지고 있을까? 해가 길어져 가는 ‘윤사월’, 제 그림자와 혼자 노는 날들이 많아진다. 슬픔이 기진하여 투명해진다. 아픔이 다하여 고요해진다. ‘고요한 외로움’이 천지의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4-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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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집 〈광휘의 속삭임〉(2008) 중에서
운명의 여신이 짓는 인연의 실은 얼마나 덧없는가! 쉽게 올이 풀려 잘려 나간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의 신이 가위질한 사람의 생애는 잠시 번득이다 만 섬광에 불과할 뿐이다. 운명은 미망(迷妄)의 어둠을 질러가는 번개 같다.
그러나 그 섬광이 지상의 나에게 쏟아져 내리는 것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이 된다. 그 까닭은 섬광이 이 캄캄한 우주를 잠시만이라도 환하게 밝혀 나를, 나의 전 생애를 의미로 충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서로의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을 이어 붙여 향기로운 존재로 잠시 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장엄함으로 오는 인연이기에 ‘방문객’은 단순히 한 ‘사람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이, ‘하나의 세계’가 오는 우주적 대사건이다. 그러니 어찌 그 빛을 다정하게 ‘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경복 평론가
2024-04-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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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원시(遠視) / 오세영(1942~ )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중에서
애틋함은 멀어지기에 발생하는 감정이다. 애틋함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생의 성숙을 맛보게 된다. 아련함도 마찬가지다.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먼 것들은 아득하고 그윽하여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그리하여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게 된다.
한때 내 것이었던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이 되었을 때 느끼는 난감함과 당혹감은 아련함의 다른 이름이다. 늙어가는 것이 그런 경우다.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가 이를 말해주는 것일 텐데, 그것은 의욕과 과시의 삶의 방식에서 체념과 겸허의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사랑의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설령 죽을 정도로 사랑하였던 사람일지라도 이제는 ‘멀리 보내고’, ‘머얼리서 바라다보’며 살아가야 함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생의 본질임을 터득해야 한다. 성숙은 자신에게 주어진 슬픈 운명을 처연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4-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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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중에서
사랑은 장력(張力)이다. 두 존재가 우연히 부딪쳐 서로 끌리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사랑의 파장은 시작된다. 그런데 사랑의 존재들은 각자 ‘하나의 별’로 탄생된 것과 같아 제 안의 인연과 운명으로 인해 중력을 지닌다. 두 중력이 서로 밀고 당기게 될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직선이 아니라 곡선, 즉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을 밟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직진으로 가닿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두레박을 드리우’지만 중력은 그리움마저 휘게 하여 ‘수만 갈래의 길’을 퍼뜨릴 뿐이다. 사랑의 고통으로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어도 사랑의 장력으로 운명의 지침은 ‘네게로 향해’ 있다. 그 고통과 열락의 시간들은 모두 너에게 가는 길, 사랑의 인력이 이끄는 ‘에움길’이 실은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알게 하는 단련의 순간들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4-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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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시집 〈시인과 갈매기〉(1999) 중에서
상처는 아름답다. 상처는 그 존재의 신산한 이력과 거기에 대응하여 애쓴 몸짓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언뜻 상처는 흉측한 무늬로 보일지 몰라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생의 의지와 그것의 가치를 증명하는 표지로 부각된다.
그 상처가 자기를 위해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면 ‘별처럼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이때 상처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행위에서 세계를 구원하는 의식(儀式)으로 격상된다. 모든 존재들이 서로 상처의 관계로 이어져 구원의 인드라망을 짜고 있는 이 화려장엄의 세계! 그런 점에서 ‘상처’야말로 이 우주의 무정형과 무의미에 정형의 아름다운 질서와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는 징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4-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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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집 〈우리들의 양식〉(1974) 중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얼마나 눈물 나게 하는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에 절절함은 증폭되고 가슴은 바싹 타 버석거린다.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간절한 대상이 찾아오면, 너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 없’고,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간절한 대상이, 아니 간절함 자체가 내 생명을 좌우하는 관건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간절함을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오’는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딜지라도 마침내 오고야 말 대상이 간절함이라면 이는 운명이기에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라는 표현은 간절함의 추구를 운명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찬이다. 하여 ‘봄’은 고통에 빠진 민중이 간절히 바라는 구원의 상징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3-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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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생강나무 / 정우영(1960~ )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시집 〈집이 떠나갔다〉(2005) 중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더 크게 품을 수 있다. 나무의 운명이 그러하다. 시에서 보인 ‘한곳에 서 있는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켜켜이 새겨두’고 있는 것이 그런 경우다. ‘생강나무’는 움직이지 않고도 ‘느린 시간을 걸을’ 수 있다.
역설은 차원을 넘고자 하는 의지다. 그 점에서 시인은 랭보의 말처럼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꿰뚫어보는 견자(見者)다. 진리를 추구하므로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드’는 놀라운 공감을, 다시 말해 우주적 영성을 획득할 수 있다. ‘지구의 여행자’에서 삼천대천세계의 수행자로 전화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생강나무’가 뿜고 있는 덕성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적 차원의 진실로 눈을 돌리게 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3-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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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중심의 괴로움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시집 〈중심의 괴로움〉(1994) 중에서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세계 그만한 에너지가 소요된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도 생명 그만한 힘이 뒤따른다. 봄에 ‘꽃피어 퍼지려’는 ‘꽃대’의 몸짓엔 ‘치열한 중심의 힘’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죽음이었던 겨울을 밀어내고 생명인 봄을 맞이하기 위해 꽃은 사활을 건 싸움을 제 중심에서부터 벌일 수밖에 없다. 그 싸움은 ‘괴롭’게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고통스럽지만, 눈물 나게 장엄한 장면이다.
탄생은 치열함이다. 온 힘을 다해야 쟁취할 수 있기에 삿된 것들은 ‘비워’야 한다. 비우는 것이 생명을 꽃피우는 장엄함으로 승화될 때, ‘피우리라’의 의지는 지상의 모든 존재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몸을 갖게 한다. 존재는 늘 흔들리고 흔들려 괴롭지만, 이를 통해 ‘중심의 힘’을 얻어 천분을 이루게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3-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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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시집 〈슬픔의 뿌리〉(2002) 중에서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노자의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에도 이 말을 적용해 볼 수 있다.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란 표현은 비움이 갖는 의미를 형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허공 속의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채움을 감싼 텅 빔의 가치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사람살이의 핵심을 찌르는 경구다. 비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관계를 두텁게 하여 생명을 살린다. 스스로 그늘이 되고 여백이 되는 사람들이야말로 은은한 여운의 아름다움을 풍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3-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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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시집 〈가뜬한 잠〉(2007) 중에서
사랑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다. 다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이더라도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지고, 그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는 귓가에 불현듯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나도 모르게 오래도록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는 홀로 쓸쓸히 낡아가는 영혼에게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끝날 수 없음을 부르짖는 증표로 나부낀다. 회한이 물결처럼 차오르는 밤!
상처는 각인이다. 홀로 내는 고추씨 같은 울음소리는 얼마나 깊은 상처의 흔적인가! 잴 수 없는 아픔의 깊이는 ‘맵게 우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가슴의 심층에 담긴 사랑은 온몸을 울림통으로 만들어 현(絃)을 켠다. 하여 잠 못 드는 밤, 이명처럼 울리는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랑을 영혼에 새기는 소리다. 김경복 평론가
2024-02-27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