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병산 우체국 / 서일옥(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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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곱고 담도 낮은 병산 우체국은

해변 길 걸어서 탱자 울을 건너서

꼭 전할 비밀 생기면

몰래 문 열고 싶은 곳.

어제는 봄비 내리고 바람 살푼 불더니

햇살 받은 우체통이 칸나처럼 피어 있다.

누구의 애틋한 사연이

저 속에서 익고 있을까.

-시집 〈병산 우체국〉(2016) 중에서

가고 싶어라 ‘병산 우체국’. 보고 싶어라 ‘칸나 우체통’. 내 마음의 깊은 곡절을 봉인해 두고 싶은 곳. 그곳에 ‘애틋한 사연’을 넣어 두면 곡절은 저 홀로 ‘익어’ 내 사랑의 절절함을 보여주리라. 그대에게 가기 위해 ‘해변 길 걸어서 탱자 울을 건너서’ 설레며 걷던 길들, 늘 손끝에 따뜻하고 정겹게 맴돌던 ‘비밀’의 글들. 만나기까지 마음 절로 향기로워져 끝내 닿게 되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병산 우체국’에 있다. 풋풋한 내 젊음의 푸른 약속이 잠들어 있다. 세월을 거슬러 ‘몰래 문 열고 싶은 곳’의 모습으로, ‘담도 낮은’ 낯익은 풍경으로 서 있는 내 그리움의 비경(秘境). 그곳은 영화 ‘화양연화’ 속의 주인공이 홀로 앙코르와트 성벽 속에 제 사랑의 비밀을 봉인해야 했던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제 ‘안’에 밀봉해 둘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 준다. 홀로 된 사랑도 저 홀로 발효하여 쓸쓸한 향기로 무르익어 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처럼.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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