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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파묘'의 파격과 관객의 위력
‘파묘’의 위력은 심상치 않았다. 일반 관객들에게 선호되는 장르가 아니었음에도 흥행 면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예상을 뛰어넘는 국내외 흥행 성적을 보여 주었다. 해외에서 나타난 ‘파묘’의 흥행 성적은 비단 누적 관객 수의 증가에만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파묘’를 바라보는 다른 나라 이들의 시선이었다.
한국 영화는 2003년 중요한 정점을 보여 주었다. 이 해에는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이 산출되었는데, 두 작품은 완성도와 작품성으로 세계적 문제작에 오른 경우였다. 한국 영화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주목되는 작품으로, 이미 세계적으로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는 경우였다. 하지만 그 시기, 한국 영화는 놀라운 우수성을 동시대 전 세계 관객과 함께 할 수는 없었다. 개별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그때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은 시기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 영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 영상 콘텐츠는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도 점차 알려져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국 영화의 고전 혹은 명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 경력이 늘어났고, 한국 영화(영상 콘텐츠)에 대한 팬이 늘어났고, OTT를 통해 공개되는 작품도 늘어났다. 이에 한국형 영상 콘텐츠에 대한 일정한 잠재적 수요 또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국형 영상 콘텐츠가 우수하기만 하다면, 언제든지 볼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이 생겨난 셈이다.
‘파묘’의 흥행은 잠재적 지지층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영화 자체가 지닌 개성과 독특함도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지만, 그동안 누적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신뢰와 기대 역시 그러한 호소력의 한몫을 담당했다. 관객 지지층의 주목되는 특성 중 하나는, 영화를 통해 한국의 상황과 역사 그리고 주변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포함된 점일 것이다. 과거 한국 콘텐츠는 역사적·사회적·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외국인들 사이에서 이해가 곤란한 텍스트로 전락할 것을 스스로 우려해야 했다. 이른바 자발적 시청을 기대하기 곤란했던 셈이다.
그래서 외국 수출 혹은 해외 시장을 겨냥하는 이들은 한국적 특수성, 예를 들면 고유한 역사나 분단의 상황 혹은 전래 문화(예술) 등을 영화 내에서 부각할 수 없었고, 인류적 보편성이나 문화적 통용성 위주로 영화를 정리해야 했다. 어찌 보면 ‘파묘’는 이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례이다. 물론 ‘파묘’에서 풍수지리와 일제 강점 그리고 친일파 문제를 거론한 것이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둔 전략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히려 잠재적 관객층이 이러한 제약을 해소하며, 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놀랍고, 다시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기 전에, 누가 그 무엇을 보고 평가하고 즐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영화 제작이 개인적 기호와 역량에 기반한다 해도,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시선으로 작품을 볼 수 있다면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겠지만, 문화 예술의 속성상 이제는 이 고민도 함께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더구나 이 점을 고민해야 했을 때 고민하지 않으며, 기껏 거둔 문화적 높이 또한 망실되는 사례 역시 나타나곤 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엇을 만드는 일은 늘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의 새로운 도약이 ‘파묘’를 기점으로 다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지금은, 그때 가지지 못했던 관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런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2024-06-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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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맹이 괭이밥과 두 여인
아마, 그때 집사람은 화단에 가득할 맹이 괭이밥꽃을 생각했을 것이다. 집사람은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현영이 엄마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지니고 있어야 할 물건을 잃어버리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딸 결혼식 때도 왔었고, 아들 결혼 때도 ‘일 때문에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많은 부조를 보냈는데…꼭 보고 싶은데.” 2년여에 걸친 항암치료에 지칠 대로 지친 집사람이, 병실 창밖을 내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집사람은, 언젠가 핸드폰을 정리할 때 실수하여 현영이 엄마의 전화번호가 지워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옛날 전화번호부 책을 찾아내어 뒤지고, 혹시나 해서 축의금 봉투를 뒤적거려도 현영이 엄마의 연락처는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연락처를 찾을 수 없다는 말에 집사람은 참으로 실망하는 것 같았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니! 꼭 해야 할 말은 없고 그냥 보고 싶어서.” 현영이 엄마는,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이웃이었다. 현영이 엄마는 늘 웃는 조그마한 사람으로, 예식장에서 매니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했고, 그 딸이 우리 딸과 또래였다. 어느 날, 집사람이 클로버 같이 생긴 풀이 담긴 화분을 책상에 올리며 “현영이 엄마가 준 꽃!”이라 했다. 무슨 꽃인지는 집사람도 몰랐지만, 해마다 분홍색 작은 꽃을 피웠다.
현영이네와는, 우리가 이사하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집사람과 현영이 엄마는 이사 후에도 자주 왕래가 있었는지, 이사한 지 20년이 넘은 시기에 치러진 우리 딸의 결혼식에, 현영이 엄마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참석했었다고 했다. 우리가 이사한 집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으므로, 집사람은 현영이 엄마가 준 꽃을 화단 가장자리에 옮겨 심었는데, 그때에야 그 꽃 이름이 맹이 괭이밥이라는 것을 알았다. 번식이 좋아 금방 화단을 덮었는데, 5월부터 한여름까지 분홍색으로 화단을 물들였다. 그 가운데 흰색 꽃도 더러 있어 고움을 더했다.
“아빠가 책 냈다고 책을 보냈더니, 축하한다며 만류를 해도 돈까지 보냈던데, 그 후에는 통 연락이 없네.” 집사람의 눈은 빈 하늘처럼 공허했다.
딸과 아들이 병실을 찾았을 때도, 집사람은 현영이 엄마와 연락할 길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때 나는, 집사람은 현영이 엄마에 대하여, 조용하면서도 끈질긴, 오래된 묵은장 같은 우정의 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궁금했다, 집사람이 투병 생활을 한 지가 3년이나 되어 가는데, 현영이 엄마는 그동안 왜 한 번도 연락이 없었을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이들을 앞에 앉혀 놓고, 현영이 엄마를 꼭 한 번 보았으면 하던 집사람은, 끝내 현영이 엄마와 연락이 닿지 못하고 임종을 맞았다. 임종 이틀 전까지 현영이 엄마를 찾던 집사람의 모습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진정 보고 싶어 하는 인정(人情)의 절절함과, 그 절절함조차 혼자서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친구의 손을 잡고, 죽음을 앞둔 그 고적(孤寂)한 심정과, 사는 동안 늘 마음 써 주어 고마웠다고, 부디 잘 지내야 한다고, 그 마음의 말을 꼭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집사람이 간 후, 첫 번째 맞는 5월! 화단에는 맹이 괭이밥꽃이 가득 피었다. 꽃을 심은 사람은, 꽃을 준 사람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다 저세상으로 가고 없지만, 인정에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맹이 괭이밥은, 질릴 만큼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기를 이토록 화려하게 춤추도록 해 준 사람이 있든, 없든, 두 여인의 인연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미풍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2024-05-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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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또 다른 설렘
길눈이 어두워서 낯선 길을 걸을 때면 자주 헤매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장소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이 골목을 돌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싶어 마음이 설레고 어느 집의 담장 아래에 핀 작은 들꽃 하나를 봐도 마냥 들뜬다. 여행하는 기분. 어쩐지 살짝 흥분되고 현실 감각이 사라진 상태가 되어 나는 길을 잃어도 두렵지가 않다.
이달 초부터 새로운 장소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에서 지하철 한 코스의 거리이기 때문에 동네 자체가 그리 낯설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었고 또 이미 세월이 20여 년 훌쩍 지나버렸기 때문에 요즘 나는 새로운 여행지를 탐방하는 자세로 오감을 활짝 열고서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물론 이런 낯섦에서 오는 긴장과 설렘도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들 것이다.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지고, 예민한 촉수처럼 솟아올라 있던 오감은 잠들어버리고,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아름다운 줄 모르게 되고, 내 생애에 단 한 번 스쳐 지나갈 귀한 장면에도 감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산책과도 같던 걷기는 어느 순간 노동의 일부가 되어 힘들고 지겹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언제 타올랐냐는 듯 무심하게 식어버리고 만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고 변명하고 싶기도 하다. 새롭고 낯선 것에 호기심이 생기고 기분이 들뜨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다만 게으름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익숙해져서 눈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는데 애써 눈을 커다랗게 뜨기가 귀찮은 것이고 여러 번 다 봤던 장면 같은데 굳이 또 오감의 촉수를 곤두세우기가 피곤한 것이다. 실은 다 안다 싶은 곳에도 내가 놓친 장면들이 무수히 숨어 있고 여러 번 봤어도 아름다운 것들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말이다.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초예술 토머슨〉이라는 책에서는 자신이 익숙하게 다니던 길 곳곳에서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토머슨들을 발견해 사진과 함께 보고서 형식으로 풀어내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토머슨’은 현대미술가이자 소설가인 저자가 창안한 개념인데, 더 이상 쓸모가 없지만 건축물이나 길바닥 등에 부착되어 아름답게 보존된 구조물이나 흔적들을 뜻한다. 이를테면 아무도 출입하지 못할 높은 위치에 존재하는 문이라든가, 창문이 사라진 벽에 홀로 남은 차양 같은 것들 말이다. 토머슨을 찾아다니던 사람들은 마침내 노상관찰학회까지 결성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들의 태도에서 묘한 감동을 느꼈다. 그것은 유용함을 표방한 새로운 것들의 홍수 속에서, 무용하게 되어버린 낡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찾고 다시금 바라보려는 애틋한 노력이었다.
얼마 전 한 소설가와 길을 걸을 때였다. 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목욕탕 입구였고 꽃향기가 짙었다. 우리는 같이 안쪽으로 가서 꽃향기를 맡았다. 가만히 보니 꽃 옆에 독서하는 소녀상이 있었다. 옛날 초등학교 화단에 이승복과 세트로 놓여있었을 법한 동상 말이다. 목욕탕 입구에 어째서 독서하는 소녀상이? 나는 고개를 조금 갸우뚱하며 웃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역시 일종의 토머슨일지도 모르겠다. 오래되고 낡고 더 이상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고 담담하게 존재하는 것 말이다.
어떤 존재로부터 숨어 있는 미(美)를 발견하는 마음, 목적지만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지 않고 발길을 멈춘 채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는 마음. 그런 세심하고도 따뜻한 눈은 이미 익숙해진 길 위에서도 새로운 감동을 찾아낸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연구자처럼 집요하게 주위를 관찰해 보자.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들은 무수히 존재하고, 그것을 발견하는 만큼 우리의 세계는 확장될 것이다.
서정아 소설가
2024-05-1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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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한 배우가 죽었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지니고, 늘 노력하는 배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어야 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은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를 지금까지 되새길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가 공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떠한 것도 공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배우는 공인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공인(公人)의 의미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용례로 “공무원은 공인으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 분명 공무원은 공인일 것이다. 하지만 배우가 반드시 ‘공인’일 필요는 없다.
'신상털이'가 부른 배우의 죽음
아픔 나누는 공동체 의식 부재
원인 되짚고 대책 고민해야
배우는 공인이 아니라는 말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배우들도 흔히 자신을 공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가 하는 일은 연기이고, 연기는 그 연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니 배우는 해당 연기를 원하는 이들만을 위한 한정된 일을 하는 사람일 따름이다.
배우가 공인이 아닌 것은 장사하는 사람이 공인이 아니고, 사기업을 다니는 사람이 공인이 아닌 것과 같다. 상인과 회사원이 공인이라면, 세상에는 공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배우가 공인이어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공인일 터이니, 굳이 공인이 ‘신상털이’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죽은 배우가 공인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알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허위가 된다.
한 사람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난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죽은 배우의 출연작 ‘나의 아저씨’에도 시련과 고난이 절절하게 나온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중년 남성의 삶과 비애도 그대로 묻어나온다. 어쩐 일인지 그만한 시련과 고통이 그에게 현실이 되었고, 진짜 삶에도 그대로 묻어나왔다. 하지만 배우는 드라마 속 세상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견디지 못했다.
‘나의 아저씨’에는 공동체의 정신을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축구를 함께하고, 저녁과 술을 함께하고, 장례와 아픔을 함께한다. 그러나 현실에는 공동체가 없었다.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다’라는 박동훈(극 중 주인공)의 중얼거림은, 없는 일까지 만들어서, 그것도 아무 일도 아닌 일을 큰일로 만들고 나서도, 결국 공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가해자들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했다. 가해자들은 알 필요 없는 일까지 기어코 알고자 했으며,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을 중대한 일처럼 만들고자 했다. 경찰도, 검찰도, 언론도, 독자도, 누리꾼도, 수다꾼도, 우리도 모두 공범이다.
자고로, 배우는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을 다독인 경험으로 다친 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고통스러운 직업이어야 했다. 부와 인기만을 누린다고 믿는 잘못된 속단과 달리, 마음속에 고통을 한가득 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앓는 이들에게 사적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이어야 했고, 상처입은 이들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은밀하게 보듬어주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니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까지 그들의 삶과 얼굴이 일일이 공개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죽었고, 4개월 하고도 2주가량 시간이 흘렀다. 한 배우가 탄생하고 연기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를 함부로 다루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을 보유했다고 해서, 그들을 내키는 대로 상처입힐 수 있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인 것처럼 죽어야 하는 누군가가 다시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배우를 향한 우리의 폭력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2024-05-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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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늙은 댄서
나는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았고, 나이 많은 여자는 옆 소파에 앉았다. 나는 이 여자와의 대화에서, 이 여자의 손녀를 이 여자에게 보호감호위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유를 찾아내어야만 했다. 이 늙은 여자의 손녀는, 환각물질이 든 본드를 흡입하고, 또래의 남학생이 훔쳐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에 동승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고, 이 고목 같이 늙은 여자가 구속된 소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늙은 여자는 담배를 꺼내 피웠다. 담배를 낀 손이 파르르 떨고 있었는데, 바짝 마른 손가락 끝의 손톱에는 엷은 분홍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고, 윤기 없이 마른 머리카락에는 바랜 갈색 염색이 묻어 있었다. 길게 그려진 눈썹 밑에는 크고, 어둡고, 깊은 눈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움푹 패인 볼과, 깊은 우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처럼 깊게 느껴지는 눈빛 때문에, 마치 영원의 세상을 바라보는 악령의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댄서였어요….” 늙은 여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어느 봄날 봄바람에 실리어 도회로 흘러들었지요. 그때 누구는 공장으로, 누구는 술을 따르는 술집으로 갔지요. 그런데 나는 고운 음악이 흐르고 화려한 불빛이 반짝이는 무도장이 좋았어요. 그래서 댄서가 되었어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춤추는 호스티스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춤을 좋아하는 댄서였어요. 처음엔 멋모르고 춤을 추었지만, 나중엔 너무 외로웠어요. 매일 밤 남자들을 바꾸어 가며 춤을 추었지만, 그럴수록 댄서들은 더 외로워지지요. 환락(歡樂)은 화려한 껍데기만 사랑할 뿐 아픈 속살은 모르는 체하거든요. 진정 필요한 것은 아픈 속살을 만져 주는 사람인데….”
“서른 살 때쯤인가, 몸이 아파 혼자 유명한 사찰이 있는 마을 여관에서 요양할 때, 내 큰 눈을 좋아하는, 몇 살 위로 보이는 남자를 만났지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랑을 했어요. 내일 같은 것은 없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댄서에게 무슨 심장(深長)한 내일 같은 것이 있겠어요? 그때 나는, 천대받는 내 직업이나 짧은 가방끈, 출생이나 집안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이란 것을 했어요. 마치 미지의 나라 여왕처럼요! 내일이 없으면 사람이 그렇게 무조건적이 되고,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어요.”
“그 남자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한 장소도 기억합니다. 헤어지고 난 뒤 임신 사실을 알았지요. 댄서가 임신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렇지만 나는 아이를 낳아 키웠어요, 왜 그랬냐고요? 아무 조건 없이 살면, 내일이 없이 살면, 그러면 모든 생명이 환희(歡喜)가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거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었지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는 것이 이 모양이겠지요.”
“아비도 없이 댄서가 키운 자식은 저 손녀만 남기고 죽었는데, 이 어미를 무책임한 인간이라고 저주하면서 그 짧은 일생을 살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후회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사람이 받은 생명을 사랑하고, 내일 같은 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면, 껍데기 같은 것들에는 연연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삶이 있을까요? 보세요! 세상 전부가 화려한 생명으로 가득한데, 우리는 내일을 생각하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 그런 것을 못 봐요!”
“이 늙은 여자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그 아이는 불쌍하지요. 어미조차 가버리고 없으니…. 소년원에서 생명의 환희 같은 걸 가르칠까요? 나는 그런 걸 가르칠 겁니다. 그 아이는…, 내 유골을 내가 처음 몸을 허락한 그 한적한 개울가에 뿌려야 할 아이거든요.” 나는 난감했다. 이 종달새처럼 방종해 보이는 늙은 여자에게 그 손녀의 보호감호를 위탁해야 한다고, 법원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024-05-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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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억에 관한 단상
불현듯, 누군가 생각날 때가 있다. 부지불식간에 연락이 끊겼거나 어떤 이유로 관계가 소원해졌거나, 혹은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일 수도 있다. 그와의 추억을 아련히 떠올리다 보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게 혼자 실컷 감상에 젖다가 돌연, 이런 생각을 떠올렸던 적이 있다.
“나만 기억하고 청승 떠는 게 아닌가?”
이런 유치한 생각을 떠올렸던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학창 시절에 꽤 어울려 다녔던 친구가 있었다. 우연히 친구 소식을 듣게 되었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친구의 경조사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다 그렇듯 우린 술잔을 기울이며 학창 시절 추억을 되씹었다. 소위,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는 식이었다.
근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당황스러웠다. 내 딴엔 소중했던 추억을 떠벌리고 늘어놓았는데 정작 그 친구는 그 추억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방학 때 친구가 나에게 쓴 편지 내용이라든지, 여학생 앞에서 부끄럼이 많았던 친구를 놀렸던 나의 장난, 혹은 그가 입영하기 전, 늦도록 함께 술 마셨던 날도 기억하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지만, 솔직히 상처받았었다. 그의 기억에는 내가 함께 어울려 다녔던 친구가 아니었다. 인생의 한순간을 함께 했음에도 가볍게 잊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생각이 들자 묘한 자괴감이 들기까지 했다. 물론, 기억 못 한 친구를 원망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내 잘못도 아니었다. 아니, 잘못을 따지는 번지수부터가 틀렸다.
나 또한 어떤 사람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던가. 각자의 의미에 따라서 다르게 기억하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그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 친구는 나름의 의미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억과 다르다는 이유로 섭섭하게 여긴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가거든’이라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 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이 가사를 되뇌면 왠지 가슴이 시큰해진다.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때 많은 사람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사라졌는데,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다니…. 누구라도 나를 그렇게 기억해 준다면 내 삶은 가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내 삶이 다하고 난 뒤, 다른 사람이 나를 기억해 준다는 사실 자체를 나는 어떻게 알까? 죽음에 임박해서 내 삶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고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내 삶의 가치를 타인의 기억으로 판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내가 잊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역이지 내 삶의 가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그 사람이 안타까워할 일이다. 그의 삶에서 누군가를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기억에 남기 위해 애쓰는 것은 공허한 욕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살아낼 뿐이다. 그래서 기억되길 바라는 삶보다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삶이 더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리워하고, 추모하고, 기억해야 할 누군가가 많은 요즘이다.
2024-04-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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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어떤 외로움
오래전 여행을 갔을 때 알게 되었던 태국인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친구는 작년부터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포도 농장에 있다고 하더니 그 이후 김 공장을 거쳐 지금은 수박 농장으로 옮겨갔다.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한다고 해서 만나지는 못하고 가끔 문자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다. 우리는 간단한 영어로만 대화하는데 지난 설날에 그 친구가 처음으로 한국어 문자를 보내왔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고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라네.’ 말투가 예스럽다고 답장을 보냈더니, 한국어로 새해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할 줄을 몰라서 구글 번역기를 돌렸다고 실토했다. 첨단 번역기에서 요즘 사람들이 잘 쓰지도 않는 하게체로 번역을 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영어로 써도 되는데 굳이 나의 모국어로 번역해서 새해 인사를 해주려던 친구의 노력이 귀여워서 혼자 조금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 친구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도 있다. 그건 주로 한국어로 된 인터넷 사이트에서 뭔가를 신청하거나 취소하는 일이 잘되지 않았을 때이다. 정말 하다 하다 안 되어서 나에게 연락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결해 주고 싶은데, 때론 나조차 도중에 실패해 버려서 미안해지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그 친구가 쇼핑앱에서 세탁 세제를 주문하려고 하는데 주문이 되지 않는다며 이유를 좀 확인해 달라고 했다. 나도 평소에 사용하고 있는 앱이었기 때문에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기서 물품을 구매하려면 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하거나, 아니면 월 회비를 내고 멤버십에 가입해야만 결제 금액에 상관없이 물건을 주문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친구에게 설명해 주었고, 친구는 자신이 지내는 숙소가 시골이라 근처에 마트가 없기 때문에 쇼핑앱의 멤버십에 가입하고 싶다고 했다. 앱에 영어 버전이 없어서 내가 친구의 개인정보를 받아 멤버십 가입을 도와주기로 했는데 본인 인증 과정에서 그만 막혀버렸다. 결국 멤버십 가입은 실패했고 내 계정으로 배달 주소만 바꾸어 물건을 대신 주문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자신이 가진 언어 수단이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세탁 세제 하나를 주문하는 간단한 일마저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20대에 외국에서 유학을 하며 수년간 그곳에서 살았던 다른 친구 하나는, 나에게 타국에서 사는 일의 외로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 외로움은 단순히 고향과 가족을 떠나 있는 데서 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자신은 성인으로서의 충분한 인지 수준을 가진 사람인데, 언어가 충분치 못해 간단한 행정 일조차 쉽게 처리하지 못할 때 종종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외롭다는 것이었다. 태국인 친구의 세탁 세제를 대신 주문하면서 나는 다시금 그 말이 떠올랐다. 이 친구도 지금 그런 외로움 속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고, 오래전 태국의 로컬 식당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모국어로 유창하게 음식을 주문하던 그 친구의 환한 얼굴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IT 강국인 우리나라는 디지털화가 빠르다. 시스템 개발도, 하드웨어 설치도, 인터넷 속도도, 심지어는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마저도 빠른 것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디지털 시스템을 신속하게 개발하고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이것의 편의성보다 장벽을 더 크게 느낄만한 소외 계층에 대한 고려가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빠름이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소수에 대한 배려는 배제하는 것이 시장 원리에 더 부합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고려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언제고 소수자의 위치에 서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속한 시스템 속에서 느끼게 될 무력감과 외로움을 떠올리면 슬픔은 이미 내 앞에 도착해 있다.
2024-04-1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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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손함과 자유분방함
외신을 보다가 외국에서 태권도가 인기라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태권도야 오래전부터 늘 일정한 인기를 유지했던 스포츠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기사였다. 하지만 기사의 뉘앙스가 예전과 달랐다. 해당 기사는 태권도가 인기를 모으는 이유가 아이들의 태도 변화 때문이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변화를 다름 아닌 부모들이 선호한다는 뉘앙스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구인들은 자유분방함을 양보할 수 없는 개성으로 여겨왔다. 그들은 개개인의 차이와 권리를 강조하고 집단과 연장자에 대한 공경심을 한쪽으로 미루어두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기사 속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것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동시에 자기중심적으로 길러질 아이에게 예절과 공경을 가르치는 태권도를 환영했고, 그러한 훈육에 기반한 한국식 교육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의 교육은 이와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요즘 학생들은 ‘교육 소비자’로 지칭된다. 그들은 언제든 자신들이 원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 항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그 책임을 교사 탓으로 돌리고 있으며, 부모 역시 귀한 자식이 피해를 당한 일에 매우 과하고 점점 격하게 대응해도 좋다고 믿고 있다.
그러던 중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이 일어났다. 아시안컵 축구 대표팀에서 벌어졌다는 이른바 ‘하극상 사건’으로 인해 전도유망한 어린 축구 선수는 매장당하다시피 했고, 지금도 비난의 화살을 좀처럼 피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때 해당 선수는 전 국민의 성원을 한 몸에 받아오던 인기 선수였지만, 선배와 고참 그리고 주장에게 대들고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행실이 집단과 팀의 결속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근신을 강요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교육 풍토를 감안하면, 이 사건은 의외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자식들이 교육 현장에서 교사의 권위를 누르고 교육 소비자로 올라가기를 바라왔던 학부모의 그간 의지를 감안한다면,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선수가 선배와 집단과 장유유서의 질서를 어기는 일은 극히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권장해야 할 사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탓하고 조그만 피해조차 경원시하던 학생이 자라서 축구 경기를 한다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고참과 선배의 지시를 참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자기 자식에게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면서도, 막상 그러한 어른이 되면 눈에 거스른다고 내치는 볼썽사나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권위에 복종하는 일과 부당함에 항의하는 일은 다를 수 있으니, 교사에게 대들고 훈육을 거부하는 일이 어떤 경우에는 정당함을 되찾는 일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동등하게 행동하라는 교훈이, 선배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는 행동과 어쩌면 근본적으로 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를 감안해도, 우리가 나의 자식에게는 권위에 저항하고 평등한 관계를 주지시키면서도 남의 자식에게는 집단의 질서를 따르고 리더를 섬기라고 강요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외국 학부모 사연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아이들의 자유에 뒤따르는 방종을 경계하고자 하고 있었다. 자유와 일탈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권위에 대한 무시는 자기 과오로 이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아이를 가르쳐야 할까.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의 말은 즐겨 무시하되, 국가대표가 되어 만나는 선배 말은 무작정 따르라고 가르쳐야 할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이 과연 하나의 가르침으로 모아질 수 있다고 보는가. 혹여, 그 사이에서 우리가 너무도 편리하게, 자기모순을 숨겨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2024-04-1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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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강을 건널 수 있는 조건
죽음이 삶의 연장인 것은, 육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는 영성 때문이다. 영성은 저세상도 창조한다.
어느 60대 후반의 독신녀가 죽었다. 이 여인은 기독교인이었고,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며 살았다. 여인은 육신이 죽으면 영혼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 나라로 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죽으면 요단강 앞에 설 것이라 생각했다.
여인은 죽어서 곧바로 어떤 넓은 강 앞에 섰다. 여인은 이 강이 사람이 죽어서 건너는 요단강이라 생각했다. 강가에는 노를 저어가는 작은 나룻배가 있었으므로, 이 배를 타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배 타기를 주저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강가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수호령(守護靈)이 강 앞에 서서 건너기를 주저하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여인에게 물었다. “왜 강을 건너지 않는가요?”
여인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생전에 이 요단강을 건너 천국으로 갈만한 선행을 한 사실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강을 건널 용기가 나지 않아요.” 수호령이 말했다. “그렇지 않을 걸요! 누구에게나 선행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손에는 손등과 손바닥이 있듯이, 삶에는 선악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기억 속을 잘 뒤져 보세요.” 그러나 여인이 아무리 기억 속을 찾아보아도 이렇다 할 만한 선행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수호령이 대신 여인의 생전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인의 친구가 찾아와 울부짖고 있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어! 아이들과 나는 버리고 말이야! 이제 살길이 막막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어!” 여인은 겁에 질려 어머니 처분만 기다리는, 아무 힘없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깊은 비애를 느꼈다. 그리고 힘없는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고 달아난 친구 남편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혐오감이 일었다. 대체 아이들이 왜 그들의 하나님인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여인은 간절히 친구를 설득했다. “네게 남은 가장 소중한 재산은 이 아들 둘이야! 힘들어도 아이들을 거두어 잘 키우면 아이들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거야!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여자 혼자 몸으로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친구는 여인의 간곡한 말을 듣고 돌아가 아이들을 품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라고 설득한 이 여인은, 그 친구가 남편으로부터 당한 참담한 배신에 몸서리쳤다. 이 사건으로, 이 여인에게 남자란, 방종하고, 무책임하고, 아무 데서나 욕망을 뿌리며 돌아다니는 천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그 충격으로 여인은 평생 독신으로 외롭게 살았다. 그리고 수호령은 아이들을 거두어 키운 친구의 삶을 추적해 보았다. 그 친구가 성장한 아들을 혼인시키며, 아들과 함께 너무도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호령은 그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여인의 기억 속에 띄웠다.
배신에 몸을 떨며, 참담하기 짝이 없는 절망 속에서 자식까지 버리려 했던 친구가, 자신의 간곡한 설득으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혼인시키며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본 여인은, 자기의 외로운 삶을 보상받은 듯한 행복을 느꼈다. 여인은 너무 흡족하여 눈물을 흘렸다. 여인은 그제야 배를 탈 용기를 얻어 노를 저어 천국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저승의 강을 건널 수 있는 조건도, 건너갈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이었다.
2024-04-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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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엄마가 없다
며칠 전,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던 딸아이가 연락도 없이 집으로 왔다. 경황없이 집으로 온 딸은 친구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문상을 가야 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딸과 친하게 어울려 다녔던지라 나도 기억하는 친구였다. 친구 아버지도 나와 연배가 비슷할 텐데 싶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문상 다녀온 딸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니 절로 한탄이 나왔다. 친구 아버지는 간이 좋지 않아 조만한 간 이식을 받을 예정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두 딸이 공여자 검사까지 끝내고 수술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아버지의 상태가 나빠져 긴급히 조치를 받아야 했는데, 수술은커녕 응급조치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근처 대학병원에선 의료진이 없다며 거부했고, 이 병원 저 병원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결국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뒀었다고 한다.
그 가족이 겪은 가슴 아픈 일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라는 생각에 새삼 두려움이 밀려왔다. 대부분 건강한 사람들은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오가는 절박함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건강하다는 이유로 이웃의 불행에 무심해도 될까 싶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 누구도 이런 사태에 자유로울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양측이 발표한 자료와 주장들을 찾아봤다. 대체 무슨 상황이기에 이런 의료 공백이 발생한 것일까? 국민 건강을 책임지겠다며 발표한 정부 정책에 전공의가 사직하고, 의대 교수들까지 일괄사직서를 제출한 사태가 왜 일어난 것일까? 내가 모르는 속사정과 어떤 불합리한 이유가 있어서 저렇게나 서로 대치하는 것일까?
서로의 주장을 찾아볼수록 두 개의 거대한 힘만 두드러지게 보였다. 정부야 두말할 것 없는 국가권력이다. 한데, 의사 또한 국민 건강과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와는 또 다른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여실히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힘겨루기를 보니 솔로몬의 판결 이야기가 떠오른다. 두 여인이 갓난아기를 놓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다투는 이야기.
정부는 지역의 필수의료 위기에 대처하고 의료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의과대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한다고 발표했다. 의료계는 일방적인 의대 증원은 추후 의료계를 붕괴시킬 것이며, 국민 건강을 위해 원점에서 재검토하자고 주장했다. 모두가 국민 건강과 국가 의료시스템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 정책에는 의대 입학 증원 수를 못 박은 것 외에는, 관련되어 예상되는 부작용 대책이나 후속적인 정책은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예상된 의사 반발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더불어 이대로라면 한국 의료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의료계의 주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지금 응급체계를 마비시켜야 할만치의 당위성을 찾기 힘들었다. 오히려, 우리는 이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또 정부는 팬데믹 시기에 한 번 실패했으니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만 가득 차 보인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면 정부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혹은 의사라는 직업이 직업 피라미드의 첨탑에 자리 잡은 것부터가 비정상이라는 냉소가 냉소로만 들리지 않는다.
지금 거대한 힘이 서로 다투고 있다. 국민 건강이라는 아이의 다리 한 쪽씩을 잡고 서로 내 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현명한 판결을 내리는 솔로몬이 없다. 내 아이의 생명을 위해 눈물을 삼키며 양육권을 포기하는 진짜 어머니도 없다. 두 다리가 찢어지며 울부짖는 아이만 있을 뿐이다.
2024-03-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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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무지라는 변명
새로운 계절이 무르익는 중이다. 나무마다 새잎이 움트고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일은 웬만한 영화 감상보다 감동적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일지언정 픽션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리얼한 세계의 감동. 길을 걷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가 있다. 물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항상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주지만은 않는다. 이제 막 피어나는 꽃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처 입은 채 죽어버린 작은 동물이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때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필요한 힘은 이렇게 매번 다르다. 권여선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드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알기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생각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오해 없이 알아챈다는 것도, 내 진심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달한다는 것도 말이다. 〈각각의 계절〉에 수록된 단편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에서 주인공 오익은 여동생 오숙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의절을 당하는데 그는 여동생이 왜 그렇게 분노하며 의절을 통보했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또 오익은 어머니가 왜 그렇게 무수한 말들로 자신을 괴롭히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한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간과한 것들, 그것이 자신에게 화살로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오익은 억울해한다.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라면서. 몰랐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무지(無知)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걸까?
직설적인 단어로 말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뜻을 파악하는 것, 어렵더라도 스스로 깊이 생각해 그 뜻을 알아채고 중요한 함의를 간과하지 않는 것, 그것은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의 기본자세이다. 그리고 문학과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인간에 대한 자세를 그렇게 갖추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에게 분노와 슬픔을 심어줘 놓고, 그 일에 대해 돌아보거나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몰랐다면서 매번 자신의 무지를 변명거리로 삼는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소설 속 주인공 오익은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인 듯한 ‘새 세 마리’라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어떤 의미와 암시를 담은 말인지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중엔 ‘파흣키에에, 궤헤그르르’와 같이 언뜻 무의미하게 들리는 소리들의 의미도 찾아내려 애를 쓴다. 얼핏 보면 뭔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 소리들은 무의미한 소리들의 조합일 뿐이다. 정작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궤헤그르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절을 선언한 여동생과 자신을 괴롭히는 어머니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이었다. 끝내 맞닥뜨려야 할 누군가의 진심은 회피한 채 그저 무의미한 말장난 속에 빠져들거나 난해한 언어를 해석하는 일에 골몰하는 오익의 태도는 어쩐지 그리 낯설지가 않다.
선거를 앞두고 수많은 말들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에게 분노와 슬픔을 심어줘 놓고 정작 그 모든 것들을 회피하는 껍데기 같은 말들에 대해서, 뭔가를 소리 높여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외면한 채 무의미로 가득 채운 그들의 언어에 대해서 말이다. 각각의 계절을 나기 위한 각각의 힘이 오직 스스로의 필요로만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끊임없이 작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 타인의 소리에도 세심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의 굼뜬 움직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봄은 지나갈 테니까.
2024-03-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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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의대의 꿈과 의사라는 직업
의대 증원을 반대하는 의사들이 사직하고 병원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충분히 협의하지 않은 의료 개혁에 동의할 수 없다며, 진료 거부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정부는 그러한 의사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각종 수치와 자료를 꺼내 들고 있다. 의사 증원이 필요한 이유와 절차를 충분히 제시했다며, 정당한 이유 없는 의료 중단은 불법 행위라고 공표하고 있다.
의사와 정부의 대치를 바라보는 대중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을 추스르고 있다. 혹시나 돌아올 의료 불이익을 걱정하면서, 두 진영의 충돌에 크게 유감을 표하고 있다. 언론은 두 진영의 대치 속에서 의사들의 파업과 사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편이며, 의대 증원과 의료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축이다. 특히 소외 지역의 의사 증원이나 의료 서비스의 균형 회복 측면에서 기존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의료 개혁이라는 사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는 선호도 1위의 직업이다. 수능을 준비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성적순으로 학교를 지원하는 일이 잦은데, 현재로서는 그 어떤 학교도 의대의 입학 성적을 쉽게 능가하지 못하고 있다. 입시계에서는 전국 의대가 우선 충원되고, 그다음 대학 입시가 시작된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의대에 들어간 이들은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기 일쑤이고, 의사라는 직업을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직업으로 간주하는 데에 익숙해진다. 이러한 의식은 그들의 영역을 성역처럼 보이도록 만들기까지 하는데, 이 특권 의식은 자기 자식을 의사로 소원하는 절대적 지지 위에서 정당화되고 있다. 그러니 작금의 사태에서 가장 근원적 책임은 의사를 특별한 이들로 만들어 버린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렇다면 의료 개혁의 문제를 의대 증원이나 의사 확대 문제로만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만일 의사의 길이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면, 의사가 되는 길을 이토록 강하게 제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혹 진리에 대한 탐구라면, 더 많은 이들이 의학에 투신할 수 있도록 문호를 스스로 개방해야 합당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는 의사가 되는 것을 선망하고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혹 우리는 안정된 직업으로서, 높은 수익으로서의 의사를 압도적으로 선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의료 문제는 단순히 의사 수의 문제만도, 이를 휘어잡으려는 정부의 문제만도 아니다. 전 국민이 의사라는 직업에 목을 매고 자기 아들만은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기이하고도 절대적인 욕망에서 그 본질적 이유를 찾아야 한다. 너도나도 의대만 부르짖지 않고 필요한 이들이 꼭 필요한 이유로 의사가 되는 길을 걸을 수만 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의대 증원을 굳이 추진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의사라는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소아과 의사가 되는 이도 자연스럽게 늘어났을 것이고, 지역이나 소외된 곳으로 내려가 자신의 의술을 기꺼이 다하려는 이도 충분히 확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하여 봉사하고 다른 이를 위하여 희생하는 소임 역시 자연스럽게 본분으로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냉정하게 자문해 보자. 왜 우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선망하고, 우리의 자식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지를. 혹여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더 높게 오를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는지를. 그렇다면 우리가 대면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고도 할 수 있다. 덜 가질 수 있는 곳에서도 기꺼이 일하고 더 낮은 곳의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는 일이 그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러한 이들을 충분히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시선과 결의가 결코 거두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2024-03-1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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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림자
어둠이 내려오자, 갑자기 어떤 따스함 - 하루종일 밖에서 뛰어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어머니가 기다리는 따뜻한 집이 생각나듯 - 그런 따스함이 그리워졌다.
따뜻한 아내의 미소가 떠오르자, 아내와 같이 명절 때마다 다녀갔던 아내의 친정집이 생각났다. 처가가 생각난 것은 아마, 이제는 아내가 기다리는 집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 되어, 뼈저리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명절 때면, 나는 시골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집안사람들의 방문이 끝날 때쯤에야 아내의 친정으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오후 늦게야 아내의 친정에 갈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아이처럼 들떠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큰 처남과 작은 처남, 그리고 아내의 삼촌까지도 모두 가족들을 데리고 와 있었으므로, 처가 집의 명절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장모님이 뛰어나와 반기고, 장인어른은 얼른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밤늦도록 지난 세월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은 아래채 할아버지 방을 차지했다. 그런 기억은 나를 항상 따뜻하게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장모님, 그리고 장인어른께서 일찍 돌아가시자 아내의 친정집은 빈집이 되어, 버려져 있었다.
아내의 웃음과 처가 가족들의 따스한 눈길과 반가운 인사가 있던 곳, 온 가족들이 다 함께 있던 곳, 그때가 가슴 저릴 만큼 그리워졌다. 나는 차를 아내의 친정집이 있는 마을로 몰았다. 아내와 명절의 들뜸으로 가던 길, 정다운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러 간다는 즐거움에 설레던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빈집이며, 이제 나는 혼자였다. 그래도 나는 그 집이 보고 싶었고, 그 집은 외로울 때면 와서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낯익은 굽이를 하나 둘 지날 때마다, 그 세월의 기억들이 하나둘 정답게 다가왔다. 아내의 친정집 마을은 희미한 달빛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 차를 세웠다. 거대한 정자나무 그림자가 나와 차를 덮었다.
나는 폐가가 된 처가의 대문을 열고 마당에 섰다. 처연하게 달빛을 담고선 폐가가 나를 맞았고, 괴괴한 고요가 흘렀다. 아무것도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없었다. “자네 왔는가!” 반기던 처가 식구 누구도 없었다. 그 따뜻한 세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하얀 달빛 속에서 내 그림자를 밟으며 할 일 없이 마당을 서성거렸다.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아 주던 그 사람들을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아내가 투병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습관적으로 아내가 뛰어놀았을 처가 동리의 들과 개울을 생각했다. 아직 어린 아내가 산과 개울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아마, 아내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투병하는 아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햇살에 까맣게 그을려 개울에서 뛰어노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내 허전하고 허기진 마음이 찾은 것은, 내 마음이 빌 때마다 나를 불러 세우는 아내와 함께했던 그 기억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내가 붙잡아 둘 수 있는 그 정다움의 실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섰지만, 내가 붙잡아 둘 정다운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와 함께했던 그 순간들은, 붙잡아 두고 싶어도 잡아 둘 수가 없는, 그리고 너무 아리고 아파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였다. 내가 찾은 것은, 아니 달빛에 젖은 나를 찾아온 것은, 더 지독한 그리움과 외로움이었다.
볼이 젖고 있는 것을 알고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2024-03-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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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MBTI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딸아이가 다가와 지금부터 질문할 테니 잠시만 집중해 달라고 했다. 가족 모두가 거실 소파에 뒤엉켜 있어도 제각각 휴대폰을 보며 따로 노는 게 일상인지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대답하라는 협박이 오히려 반가웠다.
질문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남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는가, 혹은 새로운 일과 만남을 좋아하는가, 질문을 듣고 자신에 해당하는 정도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대답하시오. 딸은 수십여 개의 질문을 연이어 퍼붓고는 이윽고 그 결과에 탄성을 질렀다.
“우와, 아빤 나하고 비슷해요.”
“뭐가?”
“아빠는 내향적이며 상상력과 감정이 풍부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에요.”
어리둥절한 내 눈을 보며 딸이 부연 설명 해줬다. 성격 테스트한 거예요. 외향적인 E형이 있고 내향적인 I형이 있어요. I형이라고 해서 사람과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는 건 아니래요. 그렇게 설명하던 딸이 E형과 I형 차이를 내 수준으로 이해할 만한 예를 들어줬다.
친한 친구와 늦도록 술 먹고 놀았을 때, E형은 친구와의 만남 자체로 휴식이 되었지만, I형은 집으로 돌아와 이제 좀 쉬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오호? 나와 비슷한데?
내가 관심을 보이자 딸은 아예 직접 읽어보라며 휴대폰을 건네줬다. 건네주며 요즘 MBTI 모르는 사람 없다. 심지어 입사 면접 때에도 MBTI 유형을 참고하는 세상이며, 소설가가 이런 걸 몰라서 되겠냐며 지청구까지 준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살펴보니 내 유형은 INFJ였다. 통찰력 있는 예언자 어쩌고저쩌고하는 내용을 읽어볼수록 내가 그 유형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그 참 신통하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질문에서 선택했으니, 내가 생각하는 ‘나’와 딱 맞아떨어질 수밖에. 그러니 이 MBTI라는 것은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나’에 관한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진실로 그런 사람일지 아닐지는 별개의 문제다.
사실, ‘나’를 규정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이나 까다로웠으면 철학이라는 영역이 진작 생겼을까. 철학은 결국, 존재와 그 주체인 ‘나’에 관한 근원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많은 주장을 살펴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아’를 말했고, 후설은 순수의식과 순수자아를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자아, 초자아, 이드라는 세 가지 정신적 영역을 소개했고, 하이데거는 존재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될 뿐이며 인간은 스스로 자기 존재를 기획해서 선택한다고 강조했었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더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자아와 의식을 따진다면 그 의식이 깃든 몸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의식이 깃든 게 아니라 몸에서 의식이 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몸에 생명이 깃들어 존재 욕망을 얻게 된 건지, 생명이 몸을 갖추게 한 건지 헷갈리는 것과 비슷하다. 몸을 이루는 세포들도 결국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자는 결국 에너지를 품은 파동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떠올리면 ‘나’라는 것이 대체 뭔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다.
이렇듯, 파고들면 들수록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하지만, MBTI 열풍을 보면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고 자신의 내면과 본질을 명쾌히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만약, 소크라테스가 내 눈앞에 나타나 너 자신을 알고 있냐? 라고 다그친다면 나는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네에? 저는 인프제(INFJ)라던뎁쇼?”
2024-02-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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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매화 한 송이
며칠 전 길을 걷다가 올해의 첫 매화를 보았다. 봄이 되면 수많은 종의 꽃들이 피어나겠지만, 겨울이 채 가기 전에 찬바람을 견디며 고고하게 꽃을 피우는 매화는 언제나 경이롭다. 그런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매화를 예찬했을 것이다. 특히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은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게도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에도 매화가 중요한 매개로 등장한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있던 시절, 두향이라는 관기(官妓)가 그를 흠모했고 두 사람은 시(詩), 서(書)에 대한 교감과 함께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시작된 지 9개월 만에 퇴계는 경상도 풍기 군수로 전근을 가야 했고, 규정상 관기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혼자 떠나게 된다. 그때 두향은 무너지는 마음을 견디어내며 퇴계에게 매화 화분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별 후 그들은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하고 서신만 주고받았는데, 퇴계가 두향에게 보낸 시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좋은 말씀을 보면서/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고 한탄을 말라.’ 나는 차가운 공기 속에 피어난 하얀 매화를 보면서, 어찌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그저 매화 화분을 건네야 했던 두향의 마음을, 그리고 그 매화 화분을 앞에 두고 공부를 이어나가는 퇴계의 마음을 떠올려 보게 된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요가 수련을 하고 있다. 사실 처음 한두 달 동안은 그저 선생님의 시범을 눈치껏 따라 하기에 급급했고, 몸의 중심을 잡기도 호흡을 고르기도 힘들었다. 요가를 하면 정신 수련이 된다는데, 정신 수련은커녕 내 몸뚱어리 하나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몇 달 동안 계속 보고 듣고 따라 하면서 육체적 고통을 견디다보니 동작이 몸에 익으면서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바가 있었다. 나의 요가 선생님은 잔소리가 심한 편인데, 힘들어도 참고 견뎌보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특히 화를 많이 낸다. 카운팅을 하다 말고 폭풍 잔소리를 한다. 그럴 때는 진심으로 절망스럽고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다. 선생님이 ‘열’까지 세어야 힘든 자세를 풀고 한숨 돌릴 수가 있는데 ‘아홉’에서 카운팅을 멈춘 채 갑자기 화를 내고 잔소리를 시작하면 어떻게 견디라는 것인가. 그런 원망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참고 버티는 쪽이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다. 운동 신경이 별로여서 체육 점수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체력장을 할 때만큼은 늘 만점을 받는 종목이 있었다. 오래달리기와 오래 매달리기. 그냥 참고 견디면 되는 것 말이다. 심지어는 수업 시간에 단체 벌을 설 때 끝까지 바른 자세로 손을 잘 들고 있다고 칭찬을 받은 적도 있다. 다른 아이들이 몸을 배배 꼬고 팔을 은근슬쩍 내려서 머리에 걸치고 할 때,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양팔을 귀 옆에 딱 붙인 채 끝까지 버텼다. 그때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오기였는지 슬픔이었는지 희망이었는지. 다만 내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은, 그렇게 참고 버티다보면 언젠가 끝은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끝날 때까지 괴로움을 고스란히 체감하며 견디다 보면 몸에도 마음에도 근력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물리적으로 이 겨울이 끝나더라도, 누군가는 여전히 남아있는 지독한 한기를 고통스럽게 버텨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마음의 근력을 단단하게 쌓아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는, 작고 하얀 매화 한 송이가 정갈하게 피어날 것이다.
2024-02-22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