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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영화의전당-수영강 연계 프로그램 모색하라
중국 저장성의 대표 관광지 항저우(杭州)는 우리에겐 제법 낯익다. 지난해 열렸던 하계 아시안게임 개최지가 바로 항저우여서 일 게다. 관광객 사이에선 “항저우에 가서 서호(西湖)를 보지 않으면 항저우에 갔다 왔다고 할 수 없고, 서호에 가서 ‘인상서호’(印象西湖)를 보지 않으면 서호에 갔다 왔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회자된다. 서호는 항저우시 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다. 인상서호는 이곳에서 펼쳐지는 수상 뮤지컬로 영화 ‘붉은 수수밭’ ‘홍등’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했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져 낭만적이면서도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놀라운 것은 호수 위에 무대를 세우고 그 위에 10cm 정도의 물이 채워진 상태에서 수백 명의 출연진이 연기를 펼친다는 점이다. 물 위를 걸으며 공연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기발한 상상력과 자연이 결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 게 바로 인상서호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부산을 항구 도시, 해양 도시라 한다. 강과 하천을 끼고 있어 때로는 물의 도시라 칭한다. 물의 도시란 물이 공간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주면서, 그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는 도시를 말한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베니스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프랑스 파리와 일본 도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도시는 수변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 나감과 동시에, 삶 속에 수변 공간이 형성돼 도시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부산도 그럴까? 과거 부산은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이 언덕과 조화를 이루며 그 속에서 삶이 공존했다. 부산 도심엔 수영강과 동천, 그리고 보수천을 비롯한 다수의 크고 작은 하천이 흘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바다로 흐르는 대다수의 하천이 복개돼 단지 해안 공간 중심의 해양 도시로만 인식될 뿐이다. 도로로 인해 생활 공간과 수변은 단절됐고, 물 공간 특유의 장소성을 가진 문화나 축제도 쉬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규모 있는 강이나 하천 말고는 우리 삶, 우리의 일상 가까이서 냇가나 실개천 같은 수변 공간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동안 부산의 수변은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
10여 년간 부산시 숙원사업이었던 영화의전당 지하차도 건설이 최근 실시설계가 마무리돼 이르면 올해 10월께 공사가 시작된다. 영화의전당과 APEC나루공원 사이 차로를 지하차도로 만들고 지상 구간은 공원, 광장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2026년 연말께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열리는 영화의전당과 그 주변은 도심에 강이 흐르는 부산의 수변 이미지를 함축한 곳이다. 하지만 영화의전당은 차로에 둘러싸여 보행로를 비롯해 공간이 오랫동안 단절돼 있었다. 이번 공사를 통해 영화의전당은 나루공원-수영강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돼 향후 수변 공간 접근성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수영강에서 인상서호 같은 특별한 공연이 펼쳐진다면 어떨까? 오스트리아 호반 도시 브레겐츠의 야외 오페라 같은 공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축구 경기장으로 사용되는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의 플로팅 플랫폼처럼 수상 무대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BIFF 개폐막식 때 초청 배우들이 수영강을 통해 영화의전당으로 진입하는 것도 생각해 봄 직하다. 그동안 영화제가 한정된 공간에서 열리다 보니, 개폐막식 때 부산을 제대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수영강에 덱을 설치해 영화의전당에서 나루공원-수영강-F1963으로 이어지는 길도 조성해 볼 만하다. 영화제 기간 외국인들이 부산을 찾았을 때 영화만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수영강에서 공연을 즐기고 인근 F1963에서 전시를 본다고 상상해 보라. 이 공간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과 문화, 공원이 한데 어우러지는 부산 대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BIFF는 물론이고 부산이란 도시의 인지도도 높아질 것이다.
BIFF는 부산이란 도시가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행사다. 올해로 29회째를 맞는다. 수변 공간과의 연계는 새로운 30년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부산시와 BIFF조직위원회, 영화의전당이 합심해 새로운 기회의 출발점인 영화의전당-수영강 연계 프로그램을 지금부터 꼼꼼하게 챙겨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하차로 완공까지는 2년 정도 남았다. 연계 프로그램을 준비하기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세계적인 문명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물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물과 협력할 방법을 찾으라”라고 말했다. 그동안 부산의 수변이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면, 이제 시민에게 그 기회를 부산시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 수변 공간과 연계한 질 높은 프로그램 개발을 기대한다.
2024-05-2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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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마을지기 사업' 부산 복지의 희망 싹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골 고향에 가는 편이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마음 한구석엔 송구함이 앞선다. 근래 고향에 갔을 때다. 집에 가보니 몇몇 생활용품이 고장 나 있었다. 냉장고는 냉장실 냉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화장실 물탱크의 물 조절 볼 탑은 연결 부위가 부러져 있었다. 나일론 빨랫줄은 낡아 햇볕에 옷을 널면 그 부스러기가 옷에 허옇게 묻어 나왔다.
냉장고는 서비스센터에 연락해 수리하고 나머지는 재료를 직접 사다 교체했다. 이번에는 시기가 잘 맞았다. 다행히 고향에 내려갔을 때 고장 난 것들을 수리·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겨울철에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수도꼭지가 얼어 탈이 나면 손재주 좋은 이웃집 형님이 곧바로 고쳐주곤 했다. 그는 고장 난 걸 잘 수리해 줘 동네에선 1980~1990년대 TV에 나오던 만능 재주꾼 ‘맥가이버’로 통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이웃집 형님에게 고쳐달라 부탁할 법도 했지만, 너무 자주 얘기하는 것도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 못 했다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일이 한꺼번에 많아진 거였다고 말씀하셨다.
요 몇 년 새 고향을 오고 갈 때면 마을 어르신들의 생활 속 문제들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 동네에 상주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이를테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 말이다. 자식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 있어 도움을 요청할 젊은이들이 없는 시골 어르신들에게 맥가이버 같은 사람은 너무나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맥가이버의 필요성’은 시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필요하다. 다행히 부산은 수년 전 맥가이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15년부터 ‘마을지기사무소 사업’이란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다. 마을지기와 만물수리사가 상주하면서 집 수선, 공구 대여, 무인택배 보관 등 소위 ‘동네 맥가이버’ 역할을 한다. 주민이 마을지기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재료비와 출장비 등으로 일정액을 내면 된다.
부산에서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마을지기사무소가 13곳이었다. 차츰 주민의 호응을 얻어 2020년에는 50곳으로 늘어났다. 2022년 부산 금정구는 연간 1278건, 부산 중구는 1200건의 서비스를 주민에게 제공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일몰제였다. 사무소 설치 후 3년간 부산시가 예산을 지원하고 이후에는 각 구·군 자체 계획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마을지기사무소는 24곳으로 쪼그라들었다. 마을지기사무소가 줄어든 것은 각 구·군 예산 사정이 여의찮아서다. 매년 사무소 한 곳당 운영비가 6000만~7000만 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산 부족으로 이 사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최근 부산시는 마을지기 지원 사업을 재추진할 뜻을 비췄다. 언론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하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지역 내 취약계층과 복지 사각지대 주민들을 위해 마을지기 사업을 펼치는 것은 오히려 지자체가 앞장서 장려할 일이다.
부산은 노인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가 넘은 초고령 도시다. 그렇기에 노인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마을지기는 부산에 꼭 필요한 사업이다. 부산은 다른 곳과 비교해 일상적인 편의시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산복도로 지형을 가졌다. 그래서 더 적합한 제도기도 하다. 따라서 이참에 마을지기 사업을 더 세밀하게 다듬어 부산이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복지 사업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최근 들어 부산시는 도시 인구의 고령화와 1인 가구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당연히 고립된 노인도 늘어나면서 관계망 회복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나이 들면 말벗이 최고라 했다. 인공지능(AI)이 어르신의 말벗이 되는 시대에 살지만, 마을지기 역시 단순히 어르신들의 생활 불편만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따뜻한 말벗이 되어줄 수 있다. 관계망 복원 역할도 얼마든지 가능하단 얘기다.
마을지기 사업의 서비스 영역도 넓혀갔으면 한다. 소규모 아파트 단지나 산복도로 등 거주민을 위해 ‘찾아가는 마을지기’도 운용할 필요가 있다. 마을지기 사업이 좀 더 탄탄해지기 위해서는 부모가 거주하는 지역의 마을지기사무소에 ‘고향사랑기부제’처럼 자식이나 친척들이 일정 금액을 기부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복지 전문가들은 “마을지기 사업은 한 동네에 온기를 불어넣고, 침체한 도시에 건강한 변화를 끌어내는 ‘촉매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마을지기 사업이 부산에서 제대로 꽃피길 기대해 본다. 이는 갈수록 느슨해지는 도심 속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달식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4-04-1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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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아파트는 죄가 있다
20~30년에 걸쳐 도시 공간을 카메라에 담은 영상을 빠르게 돌려보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단독 주택지였던 공간들이 도미노처럼 빠르게 아파트 단지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을 터이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도시들은 하루가 다르게 아파트로 채워지고 있다. 여기엔 부산도 예외는 아니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주택 인허가 물량 38만여 가구 중 아파트가 88%였다. 부산 지역은 더 심한데, 인허가 물량의 98.4%가 아파트였다. 지난해 부산의 주택 인허가 물량 2만 3129호 중 아파트를 제외한 단독, 다세대, 연립 주택은 겨우 356호에 불과했다. 한 나라 혹은 한 도시에서 새로 지어지는 주택의 90% 이상이 아파트라는 것은 외국에선 쉬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시 계획 전문가들은 “20~30년 후엔 국내에서 사람이 사는 지역엔 아파트만 남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결국 가까운 시일 내 부산의 주택은 아파트 일색이 된다는 얘기다.
혹자는 ‘단순한 데이터를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가 아파트화된다는 건 우리가 잃는 게 너무 많아서다.
잠시 자연으로 생각을 돌려보자.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물 다양성이 필요하다. 생태계의 복원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들은 서로 다른 생존 전략과 특성이 있기에, 어떤 한 종의 감소나 손실이 나타났을 때 다른 종들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만약 한 종이 없어지면 먹이사슬은 붕괴한다. 궁극적으로 생물 다양성은 생태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단 얘기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 그래서 도시를 흔히 생물체에 비유해 유기적 복합체라고 말한다. 하나의 주거 건물, 하나의 상업 지구가 아닌 전체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해 도시를 생기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상위 포식자와 하위 포식자, 생산자가 함께 뒤섞여 있어야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듯 한 도시가 다양성을 품고 있어야 그것이 섞이면서 역동성이 생기고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 더불어 거리도 활기 넘치고 경제도 활성화된다. 살맛 나는 도시, 건강한 도시는 바로 이런 것이다. 한데 도시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인 아파트가 그 도시를 싹쓸이했다는 건, 그 도시가 건강성을 잃었다는 얘기다.
물론 도시의 아파트화는 콤팩트한 주거 생활, 부동산으로서의 가치 측면에서 다른 주거 형태에 비해 유리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도 도시가 아파트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이런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부정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택 공급이 상대적으로 비싼 아파트로 쏠리면서 서민 주거 불안정이 발생한다.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하는 다세대나 연립 주택 공급에 차질을 빚게 돼 서민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주택이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다. 도시의 대부분이 아파트로 채워져 있다면, 거리를 걸을 때 너무도 따분할 것이다. 이건 엄청난 ‘시민 정서의 마이너스’를 가져온다.
아파트만 빼곡히 들어서는 것은 도시 경쟁력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지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대단지 아파트의 경우 중소 건설사 20여 개가 할 일을 대형 건설사 1~2개가 다하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 설계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다 보니 관련 기술의 역량 축적 통로는 엷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단독 주택 설계가 우리보다 훨씬 활발하다. 왜 우리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아직까지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흔히 ‘아파트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아파트가 무슨 죄냐는 것이다. 좁은 면적에 다수의 사람이 주거에 필요한 시설을 공유하면서 누릴 수 있는 아파트를 짓는 건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 영향을 놓고 볼 때 아파트는 죄가 없다라고 할 순 없다.
도시는 우리의 삶터고, 보금자리다. 그렇기에 우리의 미래다. 획일화되어 가는 도시를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다. 도시가 아파트로 채워지는 것을 막는 것은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처럼 도시를 활성화하고, 우리의 삶의 기반을 회복하는 중요한 일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유지하고 그것이 섞일 때 도시의 활기와 역동성, 변화와 창조는 일어난다. 온갖 것이 뒤섞여 생동하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새로운 활력을 낳는 도시. 그런 도시를 우린 만들어 나가야 한다.
2024-03-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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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끊긴 뱃길, 발상의 전환으로 돌파하라
‘가슴이 답답해서 찾아왔네 마음이 울적해서 또다시 왔네/ 싱싱한 파도 소리 상큼한 바닷내음 여기가 부산항인가/ 갈매기 바라보며 아무리 생각해도/ 항구의 일번지는 부산이 아니냐/ 사랑의 일번지는 남포동이 아니더냐.’ 1980년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룹 강병철과 삼태기의 ‘항구의 일번지’라는 노래 가사 일부다.
노래 속 항구 일번지는 부산항을 가리킨다. 한데 요즘은 이 말이 좀 무색해진다. 부산~제주 여객선이 끊긴 지 1년을 훌쩍 넘기고 있어서다. 지난 2022년 12월부터 시작된 2만 톤급 여객선 뉴스타호 운항 종료 이후 새 사업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여객 수요는 조금씩 늘고 있지만 중고 선박 품귀, 저비용 항공사들의 시장 잠식, 고유가로 인한 채산성 악화 등 부정적 요인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동북아 허브항만인 부산항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혹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부산과 제주를 오갈 수 있는 시대에 여객선 단절이 무슨 대수냐고 한다. 이러다가 곧 새 여객 사업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적 전망을 하는 이도 있다. 이 항로는 여러 차례 운항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부산~제주 여객선 뱃길은 1977년 4월 3000톤급 동양고속 카페리 1호, 6월에 카페리 2호가 취항해 전성기를 맞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부산연안여객터미널은 한때 제주 노선 등 11척의 배가 운항하면서 한 해 100만 명이 넘는 이용객들로 북적였다. 그땐 ‘부산항은 항구의 일번지’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시민들은 해양수도 부산, 항구도시 부산에서 제주행 여객선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다. 실제 부산에서 출발하는 유일한 연안 항로인 제주 뱃길이 장기간 끊기는 바람에 자신의 승용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제주를 관광하려는 여행객들은 큰 불편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제주행 뱃길이 오랫동안 끊어져 있는 것은 부산항 이미지에 타격이 크다. 부산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관광 콘텐츠 제공 차원에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지역 관광업계도 부산~제주 항로는 우리나라 연안 항로 중 대표 격이라 할 만한데, 여객선이 1년 넘게 없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부산해양수산청이나 부산항만공사(BPA), 부산시가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저비용 항공, 고유가 시대에 적자를 보면서까지 여객선을 띄우겠다고 선뜻 나서는 선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없다. 하루빨리 부산~제주 뱃길을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객선 운항이 지속되려면 임시방편식 찔끔 처방이나 땜질식 지원만으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부산~제주 뱃길의 부침(浮沈)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관련 기관들은 대체 선사를 구하고, 부산시와 제주도는 또다시 운항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선사 측의 경영 압박을 줄여 줄 수 있는 다각적이고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여객선 재개를 꼭 고집할 필요는 없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크루즈선을 띄우는 것도 한 방법이다. 부산~제주 간 여객선에서 벗어나 부산~통영~삼천포(남해)~여수~목포~제주를 잇는 남해안 연안 크루즈 상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남해안 연안 크루즈는 지역 관광과 경제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블루오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대규모 투자와 비용이 들어가기에 국가나 지자체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해양도시 부산은 필연적으로 바다를 지렛대로 산업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산시가 총대를 메고 한 발 더 앞서 나가는 지원과 정책을 통해 부산~제주 뱃길 활성화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물론 부산시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관광도시의 위상 정립을 위해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의 해외 노선 개척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된다. 관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느림의 미학은 존재한다. 인스턴트식품이 대세지만 숙성된 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나름의 존재를 갖는다.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도 좋지만, 느림의 미학을 찾고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여행을 즐기는 낭만도 필요하다. 그 한가운데 크루즈가 있다. 빠르게 둘러보고 오는 관광만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김순남 작곡의 ‘잘 있거라 부산항구야’의 노랫말 가사는 ‘안개 짙은 부산항에/ 연락선은 떠나려는데’로 시작된다. 부산~제주 뱃길 항로가 어떤 형태로든 부활하기를…. 제주행 항로의 뱃고동 소리가 그립다. 해양도시라는 부산의 정체성은 부산항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구축돼 왔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2024-02-0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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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컨테이너의 변신, 부산의 미래다
한때 부산의 상징이었다. 부산의 역동성, 부산다움, 혹은 부산 산업을 상징하는 이미지이자 아이콘으로 통했다. 컨테이너 얘기다. 수출이나 항만, 물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컨테이너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부산항 북항은 온통 컨테이너로 빼곡했다. 이젠 북항 재개발로 자성대부두의 초대형 하역 장비와 빈 컨테이너가 조만간 신감만부두로 이전한다. 이미 지난달 26일 자성대부두의 빈 컨테이너 일부는 이전을 시작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켜온 컨테이너의 자리바꿈, 나아가 산업화 시대에 부산 산업의 주역이었던 컨테이너의 ‘도심 퇴장’이 시나브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과거엔 컨테이너 활용이 산업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물자 수송이라는 기능의 한정성을 벗어나 갤러리, 사무실, 음식점, 버스 정류장 등 일상 공간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된다. 설치가 쉽고 이동도 비교적 자유로운 게 장점이다. 부산도 일찍부터 컨테이너에 주목했다.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BIFF) 열 돌을 맞아 선보인 ‘비프 빌리지’(파빌리온)가 대표적이다. 해운대해수욕장 주변에 컨테이너를 층층이 쌓아 만든 비프 빌리지는 영화제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특히 잦은 곳 중의 하나였다. 2013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사상인디스테이션도 컨테이너의 활용이었다. 20여 개가 넘는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사상인디스테이션은 개관 이후, 서부산 지역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넓히는 데 기여해 왔다. 또 다른 복합문화공간이자 부산 컨테이너 공간의 상징이었던 ‘비콘 그라운드’는 특이하게도 수영구 망미동 고가도로 아래 설치돼 시작부터 주목받았다. 부산 사하구 장림포구, 일명 ‘부네치아’(부산의 베네치아)도 포구 주변을 컨테이너로 꾸며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부는 그 존재감마저 유명무실해졌고, 일부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대 갈림길에 선 컨테이너 공간들. 이들의 돌파구를 위해 전문가들은 “시민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각에선 컨테이너를 통해 좀 더 멋진 공간이 연출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컨테이너가 만들어 낸 형태가 더 관심거리가 돼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도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공공 예술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든 경기도 안양의 APAP(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오픈스쿨이 대표적이다. 이 역시 컨테이너 구조물이지만,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거나 땅에서 3m 정도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건물 모양이 눈길을 끈다. 오픈스쿨은 샛노란 페인트칠까지 더해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컨테이너의 쓰임과 용도는 상상력이 더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부산의 컨테이너 공간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큰 부침을 겪고 있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2022년 열린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는 보았다. 1000개에 가까운 컨테이너를 활용해 축구 경기장을 일회용으로 만들어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한 후, 대회가 끝나자 곧바로 해체해 재활용하는 것을 말이다. 이는 컨테이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카타르 월드컵처럼 컨테이너 활용에 상상력을 더한다면 컨테이너는 향후에도 부산의 상징, 부산의 미래 자산으로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
컨테이너의 재발견은 그 가능성에 대한 대답이다. 심각한 기후 변화로 인해 겪게 될지 모르는 자연재해에 대비한 주민 피난처나 임시 주거지 등으로 컨테이너를 활용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산불이나 태풍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에서는 텐트가 아닌 컨테이너가 임시 거주 시설로 사용될 수 있다. 부산의 해양도시 건립에 컨테이너를 이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IoT(사물인터넷) 장비를 활용한 컨테이너, 오래된 해상운송 냉동컨테이너를 개조해 스마트 팜으로 활용하는 도시 농사꾼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우리는 컨테이너의 이런 활용과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상상력과 고민이 더해진 컨테이너의 다변화는 ‘침체된 도시를 살리는 침술’이 될 수도 있다.
한 도시의 정체성은 그 도시가 갖고 있는 역사성과 고유한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컨테이너는 여전히 부산의 상징이고 부산다움이다.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의 주도 쿠리치바를 ‘세계가 주목하는 꿈의 생태도시’로 변화시킨 건축가 자이미 레르네르. 그의 말을 빌리자면 침체된 도시엔 건강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도시 침술’이 필요하다. 부산에서 그 침술 하나를 찾는다면, 컨테이너가 될 수 있단 얘기다. 가능성을 품은 컨테이너의 변신이 기대된다.
정달식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3-11-28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