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고사(古寺) 1 / 조지훈(1920~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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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시집 〈청록집〉(1946) 중에서

마음이 고요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세상은 밝고 환하게 켜졌다가 점차 어슴푸레하게 기울어 간다.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지’듯, 그냥 하루가 영글었다가 이울어 간다. 세상도 고요할 뿐이다.

슬픔인가? 아니면 기쁨인가? ‘말이 없이 웃는’ 것은 무슨 감정일까? 정밀(靜謐), 고요하여 편안함! 누구는 이를 심심상인(心心相印)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순진하기만 한 ‘졸음’을, 어리석고 가엽기만 한 ‘잠’을 지긋이 바라보고 ‘웃으시는데’, 오늘은 석가탄신일, 어디로 ‘꿈’의 머리를 두어야 할까? 고요하여 빽빽한 하루, 외로운 한낮, 낮잠을 자다 흠칫 깨어보면 세상은 몽롱한 꽃잎, 꽃잎, 붉게 물든 황혼이 되어 낱낱이 떨어지고 있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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