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대통령님! 거기는 전기가 없습니다"

이병철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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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등 대형 발전소 비수도권 밀집
송전탑 건립, 비용·민원 탓 힘들어
‘전기 오지’ 수도권 산업 집중 ‘코미디’
전력 생산지 중심으로 공장 설립해야
AI 시대, 전기 기반 산업 재편 절실
수도권 탈피해 국가균형발전 새판 짜길

지난주 덕구온천에 몸도 담그고 친구도 볼 겸해서 경상북도 울진을 찾았다. 친구 부부와 죽변항에서 동해 앞바다에서 갓 잡은 장치탕 한 그릇을 비웠다. 식후 커피를 위해 죽변항 일대를 돌았지만, 친구는 ‘스타벅스’는 여기 없다면서 겸연쩍은 웃음을 보였다. 인구 5만 명이 무너지고, 지방소멸이란 괴물과 사투하는 대한민국 지방 소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덕구온천으로 향하는 길 오른편으로 신한울원자력발전소가 펼쳐져 있었다. 지난달 가동을 시작한 신한울2호기에서는 연간 서울에서 1년간 쓰는 전력량의 21%인 1만 56GWh 전기를 생산한다. 그 옆에는 2033년 준공 목표로 신한울3·4호기가 들어설 부지 조성 작업이 한창이었다.

문제는 이곳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낼 방법이 막연하다는 점이다. 송전탑 건설은 2012년 밀양 사태처럼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 동해안의 대형·신규 화력발전소들이 수도권으로 연결할 송전선로가 없어 속속 가동을 멈추는 황당한 일조차 벌어지고 있다. 2036년까지 건설될 1000MW 이상 설비용량의 대형 발전소는 신고리5·6호기를 비롯, 하동복합, 신호남복합, 울산복합, 신한울3·4호기 등 대부분 동·서·남해안에 밀집해 있다.

전기 확보 방안조차 묘연한 수도권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공장 신설이 무더기로 계획돼 있다.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 60%가 수도권에 있다.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선다. 2050년까지 이곳에 필요한 전력은 10GWh에 이른다. 원전 10기에 이르는 대규모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 첨단공장을 마구 짓는 코미디를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이 자행하는 셈이다. 대통령과 삼성, SK그룹 회장이라면 한전에 “전기가 있느냐”는 질문부터 먼저 던져야 했다. 뒤늦게 한전만 쳐다보고 있다. 200조 원의 빚을 떠안은 한전은 송전탑 신설은 차치하고, 기존 선로망 유지·보수조차 힘든 상황이다. 국가전력망 정전 사태가 2018년 506건에서 2022년 933건으로 85%나 급증한 것이 방증이다.

정부와 서울 언론, 기업들은 약속이나 한 듯 ‘지역이기주의(NIMBY), 지역 주민과 결탁한 지역 정치권·지자체가 문제’라고 손가락질한다. 국가가 나서서 송전선로를 건설하는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조속히 통과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송전탑이 삶의 터전을 짓밟는다고 외치는 주민을 무시하고 한전 대신 국가가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독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본인들의 강남아파트 앞에 변전소 하나 설치해도 “집값 떨어진다”면서 난리를 칠 ‘서울 사람’들은 허구한 날 지역의 희생에만 목을 매고 있다. ‘국가 성장동력 확보’란 허울에 숨은 ‘망국적 수도권 집중’의 민낯이다.

세계는 인공지능(AI) 시대로 옮겨갔다.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AI 생태계는 전기로만 움직인다. 2050년쯤엔 지금보다 1000배의 전기가 더 필요하다는 예측이다. 오픈 AI 창업자 샘 올트먼이 ‘전기를 쥔 자가 살아남는다’고 외치고 있다. ‘글로벌 데이터센터 허브’로 불리는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가 전기 부족을 우려해 데이터센터 신설을 제한하는 법을 발의할 정도다.

이제는 ‘전기가 있어야 공장을 돌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수도권에 계획된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전력 수요처를 발전소가 집중된 지역으로 분산하도록 국가산업정책을 재편해야 한다. 그것이 ‘에너지 안보’다. 안정적인 전기가 넘쳐나는 ‘전기 맛집’인 삼척과 울진, 기장, 하동, 삼천포, 영광 등 대형 발전소 인근에 첨단공장을 건설하면 된다. 막대한 송전선로 공사비와 유지비, 사회적 갈등 조정 비용을 기업 보조금으로 활용해도 국민은 박수칠 것이다. 기업과 정부는 ‘인재 구인난’을 들면서 손사래 치겠지만, 지역마다 거점 국립대학과 포항공대, DGIST, 유니스트 등 첨단기술에 특화된 우수한 대학이 있다. 우수한 기업이 없을 뿐이다.

이는 지방소멸을 막고, 국가균형발전에도 엄청나게 기여한다. ‘무식한 촌놈’ 때문이 아니라, ‘이기적인 서울 사람’들 때문에 국가의 경쟁력을 망치는 것이다. 송전탑 건설이 어렵다면, 인력과 공장을 분산하는 것은 노력으로도 가능하다. 첨단산업 경쟁이 국가 대항전이 됐다면, 가장 빨리, 효율적·복합적으로 효과를 낼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린 탓에 송전탑이 촘촘히 꽂힌 지방만 소멸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아들딸은 힘겨운 서울살이에 지쳐 가정을 꾸릴 꿈조차 갖지 못한다. 저출생과 국가 소멸의 주요 원인이다. 언젠가 울진 친구 부부도 삼성전자 반도체 울진공장에 취직한 딸 부부와 동해 장치로 요리한 식사를 함께하면서, ‘스타벅스’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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