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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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근래 BBC 다큐 ‘버닝썬’ 방영
당시 사건 수면 위로 재조명

지나갔지만 중요도 높은 사건
다시 알리는 것도 언론 역할

무엇보다 피해자를 중심에 놓고
약자의 관점에서 보도해야

얼마 전 영국 공영방송 BBC의 탐사보도팀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버닝썬-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공개되면서 잊고 있던 버닝썬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1시간 남짓 분량의 다큐를 보다가 새삼 이 일들을 잊고 살아온 세월이 느껴졌다. ‘맞아, 이런 일이 있었지’ 하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흔히들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 꽤 많은 일들이 잊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듯 모두의 아픔도 공평하게 앗아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이 견뎌온 시간의 무게는 다른 이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다큐에는 그 사건의 흔적을 안고 있는 직접적인 피해자뿐만 아니라 사건을 취재하면서 위협을 당해온 박효실, 강경윤 기자의 이야기도 심도 있게 다뤄졌다. 5년이 지났지만, 당시 버닝썬 사건을 취재하고 단독보도를 냈던 강경윤 기자는 정준영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메시지를 보면 아직도 “심장이 아프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피해자들이 보낸 시간의 무게를 공감하고 연대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번 버닝썬 다큐를 보면서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는 시기적으로 가해자 정준영의 출소와 맞물려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방송국 측에서 이 시기를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다시금 ‘버닝썬’을 떠올리게 하면서 비슷한 사건에 다시 시선을 모으고 피해자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했다. 이런 것이 언론의 순기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스는 시의성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중요한 사건을 다시 상기시키는 ‘리마인더’의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분명 시간이 흘러도 가치 있는 뉴스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산일보〉가 기획 기사로 다뤘던 형제복지원 사건도 비슷한 측면에서 유의미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2020년 〈부산일보〉는 피해자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인터뷰했고 그때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사와 영상 뉴스로 녹여냈다. 그 때문에 기사를 읽은 시민들은 여전히 부산이라는 지역에 피해자들이 살고 있으며 여전히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처럼 언론이 심도 있게 다룰수록 그 사회의 경험치와 마인드는 달라진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건사고들이 발생하고, 언론사들은 각 사의 판단 기준에 따라 뉴스를 보도한다. 어떤 사건을 중요도 있게 다룰 것인가는 각 사의 논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희망하는 것은 언론들이 이번 버닝썬 다큐와 같이 사람들에게 잊힌 사건들도 수면 위로 올려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들을 다시 다룰 것인가’를 고민할 때, ‘피해자 중심’이라는 기준이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여전히 다수의 폭력이 행해지고 양형 기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은 피해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설파한 ‘파레시아’ 개념으로부터 그 근거를 빌려올 수 있다. 파레시아는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한다. 그가 이 개념을 말한 이유는 사람마다 영향력과 발화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가 현실에서 엄연한 만큼 진실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존재에 더 많은 조명을 비춰야 한다는 뜻이다. 당위적으로 모든 사람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여겨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 사람의 발화 크기는 모두 다르다. 부가 더 많을수록, 더 유명할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영향력이 크다. 이들이 가해자일 경우에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은 피해자들은 자신의 이야기와 의견을 널리 알리기 어렵다. 이때 이들의 입에 마이크를 갖다 대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철 지난 뉴스들이 ‘끌올’(끌어 올리기)되는 게 익숙한 사회가 됐으면 한다. 그게 그 긴 시간을 버텨왔지만 여전히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들과 온도를 맞출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는 것은 큰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번 BBC 버닝썬 다큐에 대해 ‘이런 다큐가 한국 언론에서 나왔으면 더 좋았겠다’라는 댓글이 달렸고, 이 댓글은 많은 수의 추천을 받았다. 앞으로 한국 언론이 피해자 중심의 마인드를 장착해 여전히 중요하고 알아야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면 좋겠다. 그래야 다시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동력을 모을 수 있고, 동시에 피해자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찾는 것, 그것이 언론의 역할이자 뉴스를 읽는 대중들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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