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하루는 잠시 안녕”…적도 바다에서 즐긴 초여름 자유

남태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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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일상 탈출]

휴대폰 끄고 외국 날아가 세상과 차단
이른 아침 해변 파라솔 아래에서 힐링
골프 즐기고 수영장 벤치서 사람 구경

평화로운 마누칸 섬에서 느긋한 하루
바닷가 독서·오수·사진 등 다양한 표정
먼바다 황홀한 일몰 보며 멍때리기도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수트라 하버 리조트 전경. 남태우 기자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수트라 하버 리조트 전경. 남태우 기자

올해 여름 바캉스는 미리 떠나기로 했다. 목표는 단 며칠이라도 피곤한 일상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대폰 로밍 서비스를 신청하기는커녕 이심(eSIM)이나 휴대용 와이파이 단말기도 빌리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휴대폰을 끈 뒤 적도 인근인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항공기에 오른 것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다섯 시간을 날아 코타키나발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트라 하버 리조트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쯤. 이제 세상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흘의 ‘일상 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코타키나발루 마누칸 섬 해변에서 한 관광객이 독서하면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코타키나발루 마누칸 섬 해변에서 한 관광객이 독서하면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리조트의 호캉스

지친 몸의 피로는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아침 일찍 깨지 않을 수 없다. 굳게 닫힌 테라스 문틈으로 들려오는 어린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풍덩거리는 물소리 때문이다. 눈을 부비며 테라스로 나가자 시원한 풍경에 잠이 확 달아난다.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의 잔잔한 파도 사이로 햇살이 반짝인다. 바다와 리조트 사이에 마련된 초대형 야외 수영장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아침 수영을 즐기는 중이다.

서둘러 대형 수건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간다. 먼저 야외 수영장에 뛰어들어 몸에 가득한 피로부터 씻어낸다. 이어 바다 바로 앞에 설치된 비치파라솔 아래 리클라이너 벤치에 몸을 누인다. 덥지도 차지도 않은 바닷바람이 선선하게 온몸을 휘감고, 나지막하게 찰랑거리는 파도소리는 자장가처럼 머리를 감돈다.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두 눈은 스르르 감겨버린다.

한 노인이 수트라 하버 리조트 앞 바다의 파라솔 아래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한 노인이 수트라 하버 리조트 앞 바다의 파라솔 아래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옆방에서 뒤늦게 깨어난 지인의 재촉 때문에 늦은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이번에는 셔틀버스를 타고 골프장으로 향한다. 사람이 많지 않아 복잡하지 않았던 덕분에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며 느긋하게 공을 친다. 카트를 직접 몰고 이동하다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밝은 미소로 인사한다. 그들의 얼굴에도 멋진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운 웃음이 가득하다.

수트라 하버 리조트 골프장에서 관광객들이 골프를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수트라 하버 리조트 골프장에서 관광객들이 골프를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골프장에서 돌아온 뒤 다시 대형 수건을 들고 야외 수영장으로 내려간다. 이번 자리는 야외수영장에 설치된 파라솔이다. 물속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녀들, 구명대를 착용한 채 아빠 품에 안겨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 아이, 인스타그램에 올릴 멋진 사진 한 장을 건지려는 여성들, 히잡을 쓴 것도 모자라 온몸을 옷으로 두른 이슬람 여성, 남편은 어디 갔는지 혼자서 멍때리기에 여념이 없는 할머니….

같은 리클라이너 벤치이지만 바다 바로 앞과는 다른 분위기다. 다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어쨌든 즐겁고 신난 것만은 눈치 챌 수 있다. 세상에 사람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는데, 벤치에 드러누운 채 눈만 굴려 수영장을 둘러보는 지금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수트라 하버 리조트 수영장에서 관광객들이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수트라 하버 리조트 수영장에서 관광객들이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마누칸 섬의 자유

둘째 날 목적지는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마누칸 섬이다. 리조트 수영장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섬으로 가는 사이 배 위에서 즐기는 패러세일링, 제트스키, 바나나보트는 온몸에 짜릿한 전기를 흘려보낸다.

관광객들이 바다에서 제트스키를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관광객들이 바다에서 제트스키를 즐기고 있다. 남태우 기자

마누칸 섬 선착장에 내리면 두 얼굴의 해변이 손님을 맞이한다. 선착장 왼쪽은 섬의 사설 숙소에 묵은 고객만 이용할 수 있는 폐쇄형 해변이고, 반대쪽은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자유형 해변이다.

마누칸 섬의 폐쇄형 해변에서 한 여성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마누칸 섬의 폐쇄형 해변에서 한 여성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태우 기자

마누칸 섬 오른쪽 해변은 정말 독특하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숲 바로 앞에 오염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섬에서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양하고 이채롭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모습은 파도에 밀려 떠내려 온 통나무에 등을 기대 온몸을 태우면서 독서하는 젊은이다. 그는 과연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젊은이 옆에서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두 노인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수에 빠졌다.

숲이 우거진 마누칸 섬의 해변에서 관광객들이 다양한 형태로 휴식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숲이 우거진 마누칸 섬의 해변에서 관광객들이 다양한 형태로 휴식하고 있다. 남태우 기자

바다에서는 환한 표정으로 물놀이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구명조끼를 입은 채 장난을 치는 두 소녀, 물에 몸을 담근 채 두 소녀를 지키듯이 바라보는 맨머리 노인, 검은색 차도르를 온몸에 두르고 바다에 뛰어들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이슬람 여성들, 그들 옆에서 짧은 치마와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역시 사진을 찍는 동양인 여성들, 조금 더 먼 바다로 나가 스노클링을 만끽하는 젊은이들…. 역시 세상은 넓고 인생의 표정은 다양하다.

마누칸 섬 해변에서 젊은 여성들이 SNS에 올릴 사진을 찍고 있다. 남태우 기자 마누칸 섬 해변에서 젊은 여성들이 SNS에 올릴 사진을 찍고 있다. 남태우 기자

■이국 일몰과 멍때리기

코나키나발루에 가면 반드시 일몰을 구경하라는 게 많은 블로거, 유튜버의 조언이었다. 바다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은 영원히 잊기 어려운 장관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수트라 하버 리조트만이 아니라 코타키나발루의 여러 해수욕장에는 늦은 오후만 되면 일몰 사진을 찍으려고 많은 사람이 몰린다. 탄중아루 비치와 코콜 힐 그리고 베링기스 비치는 도시와 하늘,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3대 해변 일몰 명소라고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일몰 자체만으로는 황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다와 섬, 산 그리고 어선이 어우러져 관람객을 무아지경에 빠뜨리는 부산 사하구 다대포 일몰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야외 수영장 시설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주변 분위기와 어우러질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관광객들이 수트라 하버 리조트 앞 해변에서 일몰의 매력에 빠져 있다. 남태우 기자 관광객들이 수트라 하버 리조트 앞 해변에서 일몰의 매력에 빠져 있다. 남태우 기자

여행 사흘 내내 오후 6시 무렵이면 야외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낮과는 달리 수영복을 입을 필요도, 대형 수건을 들고 갈 필요도 없다. 그냥 원하는 자리를 찾는 안목만 있으면 된다. 이 시간이면 늘 해변 바의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다. 대부분 젊은 부부나 연인이다. 가족이나 친구, 또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테이블보다는 해변 석축이나 잔디밭을 선호한다.

자리는 어떻든 사실 상관이 없다. 그냥 먼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기울어가는 해를 보면서 멍때리기만 잘하면 된다. 집에서도 가끔 창밖으로 낙동강 너머로 지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멍때리기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으면서 모든 걸 비우는 것은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지금 이곳은 부산에서 수백 km 떨어진 외국이다. 멍때리기를 끝으로 사흘간의 자유는 막을 내린다.


남태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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