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서스펜스 다 잡은 ‘시민덕희’…킬링타임으론 합격점 [경건한 주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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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추적극.’ 지난 24일 개봉한 영화 ‘시민덕희’ 홍보 문구입니다. 벌써 불안합니다. 그동안 숱한 한국 영화 포스터에서 ‘통쾌’라는 단어를 봤지만, 정말 통쾌했던 영화는 얼마 없습니다. 일례로 ‘시민덕희’와 제목이 비슷한 작년 개봉작 ‘용감한 시민’도 ‘통쾌한 한방’을 날린다며 적극 홍보했지만 흥행에 실패해 손익분기점도 넘기지 못했습니다.

기대감을 내려놓고 직접 만난 ‘시민덕희’는 달랐습니다. 코믹과 스릴을 오가는 완급 조절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화 바탕이라는 점도 한몫했습니다.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중년 여성 덕희(라미란)가 소극적인 경찰 대응에 지쳐 직접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으러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2016년 발생했던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고 상당한 각색을 거쳤습니다.

영화는 덕희가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덕희는 운영하던 세탁소와 집이 불에 타 세탁 공장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덕희는 은행 직원을 사칭한 ‘손 대리’의 대출 권유에 속아 3200만 원을 홀랑 넘겨 버렸습니다.

덕희는 황급히 경찰을 찾아가지만 피싱 사건 담당인 박 형사(박병은)는 무신경합니다. 피곤에 절은 표정의 박 형사는 ‘실제로 돈을 찾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며 사실상 손을 놓아버립니다.

그야말로 울화통이 터지는 상황.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이 보입니다. 사기를 치고 잠적했던 손 대리가 다시 덕희에게 전화를 걸어 ‘제보’를 하겠다는 엉뚱한 말을 합니다. 알고 보니 손 대리는 일자리를 구하려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납치·감금된 한국인 재민(공명)이었습니다. 폭행과 협박에 못 이겨 억지로 범행에 가담한 재민이 탈출과 생존을 위해 일종의 스파이가 되기로 한 겁니다.

덕희는 이런 제보 내용을 다시 박 형사에게 전하지만, 100억 원대 사기 사건을 맡게 돼 정신이 없는 박 형사는 ‘말이 되느냐’며 심드렁합니다. 사실 첫 제보 내용도 중국 칭다오의 한 건물에 ‘콜센터’가 있다는 게 전부입니다. 결국 덕희가 직접 조직을 찾으러 칭다오로 향합니다. 세탁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조선족 출신의 동료 봉림(염혜란)과 숙자(장윤주), 그리고 봉림의 친동생인 중국 현지인 애림(안은진)이 한 팀이 됐습니다.

영화는 긴장감과 코믹 모두 잡았습니다. 갑자기 첩보원이 된 재민이 무시무시한 보이스피싱 간부들의 눈을 피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연출하는 서스펜스가 적당한 긴장감을 안깁니다. 꽤 폭력적인 장면들도 있는데, 역시 스릴러 장르에서 볼 법한 수준입니다. 극악무도한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이무생)도 ‘빌런’(악당)으로서 존재감을 뽐냅니다.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유머에 긴장감 겸비…힘 뺐으면 더 나았을지도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들로 구성된 덕희 일당의 허술함 역시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합니다. 콜센터 주소를 파악하기까지 여러 위기가 닥치지만 기지를 발휘해 해결해냅니다.

웃음 타율도 좋은 편입니다. 자연스러운 상황 설정에 베테랑 주조연들의 연기를 얹으니 시너지 효과가 납니다. 예컨대 덕희의 전화를 무시하며 ‘갑’ 행세를 하던 박 형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을’로 변하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티키타카가 재미를 줍니다. 다만 개그 코드가 젊은 세대보다는 중장년층에 좀 더 맞는 느낌입니다.

이처럼 기대감을 내려놓고 단순 킬링타임 영화로 평가하자면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좀더 깊이 디테일을 따지고 들어가면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감초 캐릭터인 숙자를 예시로 들어볼까요. 세탁 공장 직원인 숙자가 느닷없이 카메라 전문가나 쓸 법한 ‘대포 카메라’를 들고 중국에 간 것부터 부자연스러운데, 이 거대한 카메라로 보이스피싱 일당을 대놓고 촬영하지만 한 번도 발각되지 않습니다. 숙자는 평소에도 지나칠 정도로 철이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결정적인 순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다른 캐릭터 역시 전형적이고 작위적인 면이 있습니다. 덕희 일당의 언행은 코믹 장르임을 강조하는 듯 시종일관 호들갑스럽습니다. 몰래 미행을 하다 팸플릿으로 티가 나게 얼굴을 가리는 식의 뻔한 클리셰들이 있습니다. 특히 ‘통쾌한 한 방’을 노린 듯한 결말부는 극적인 효과는 있지만, 개연성과 현실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에서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전체적으로 연출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습니다.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개성 부족’ 아쉽지만 ‘메시지’는 만점

여성 서사는 반갑습니다. 배우 염혜란은 ‘시민덕희’ 개봉을 앞두고 언론과 인터뷰에서 “여자들이 하나로 뭉치면 뭐든 잘한다”고 했는데요. 이 말대로 극 중 4인조 여성 주조연이 의기투합해 범죄 조직에 맞서는 스토리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남탕’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한국 영화계에 필요했던 내러티브입니다.

다만 여성 캐릭터들을 잘 살렸는지는 의문입니다. 장윤주는 너무나 전형적인 개그 캐릭터로 소모됐고, 안은진의 역할도 중국 현지 가이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여성 경찰 3인조가 팀을 이뤄 범인을 잡는 ‘걸캅스’와 이미지가 겹치기도 합니다. 여성 캐릭터 비중으로 점수를 매기는 ‘벡델 테스트’야 통과하겠지만, 차별성에 대해선 좀 더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건 역시 라미란의 명연기입니다.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가 일품이고, 염혜란과의 호흡이 돋보입니다. 가족을 위해 한없이 강해지는 엄마, 경찰의 무능에 분노하는 피해자, 범죄에 맞서는 정의로운 소시민 등 여러 면모를 소화해 입체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다만 일각에선 이미지가 너무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옵니다.

‘시민덕희’의 모티프가 된 실화 사건은 영화 못지않게 극적입니다. 2016년 보이스피싱에 속아 목돈을 넘겨준 경기 화성시 주민 김 모 씨. 그는 이후 자신에게 자수한 범인의 구체적인 제보를 통해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단서들을 확보했습니다.

김 씨는 이 단서를 경찰에 넘겼지만 담당 경찰관들은 시큰둥, 되레 김 씨를 비웃었습니다. 김 씨는 무능한 경찰에 의지할 게 아니라 직접 나서야겠다고 판단, 조직원을 설득해 수십 통의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총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피해자들의 명부까지 입수했습니다. 이 단서 덕분에 총책은 닷새 만에 검거됐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숟가락만 얹고도 감사 인사는커녕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부끄러운 줄은 알았는지, 김 씨의 활약은 쏙 빼놓고 경찰의 적극 수사로 검거에 성공한 것처럼 보도자료를 뿌렸습니다. 심지어 총책을 검거했다는 사실을 김 씨에게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보이스피싱 검거에 기여한 시민에게 주겠다고 홍보했던 보상금 1억 원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총책은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지만 김 씨는 끝까지 제대로 된 보상도 감사 인사도 받지 못했습니다.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덕희’. 쇼박스 제공

이처럼 분통 터지는 사건이지만, 영화에서는 경찰이 늦게나마 제 역할을 합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미화’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합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훌륭합니다. 지난 24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박주영 판사는 ‘전세사기’ 사건 피고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며 피해자들을 위로해 화제가 됐는데요. 당시 박 판사는 피해자들에게 “절대로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아 달라”면서 “탐욕을 적절히 제어 못 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 같은 피해자를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피해 본 건 아니란 걸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시민덕희’ 역시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점을 러닝타임 내내 강조합니다. 연출을 맡은 박영주 감독은 지난 11일 시사회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내가 어리석은 탓에 당했다’고 자책하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며 “피해자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려보려고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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